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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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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사단법인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한국문학과 예술 한국문학과예술 제29집
발행연도
2019.3
수록면
131 - 173 (43page)
DOI
10.21208/kla.2019.03.2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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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지금까지 확보된 20편의 속리산 유산기를 대상으로 여기에 나타난 조선후기 속리산 유람의 양상과 그 의미에 대해 살피고자 하였다. 속리산 유산기는 17세기에 비로서 등장하는데 이는 조선전기와 중기에 걸쳐 유산기에 영향을 미친 영남지역 사림들과는 달리 일반사대부들의 경우 유산을 기록하는데 있어서 소홀했던 성향 때문으로 판단된다. 17세기 속리산 유산기는 총 5편으로, 이 가운데 4편이 유산록의 체제로 기록되어 기존의 유람기록의 한 부류였던 유산기의 체제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양이다. 이 또한 조선중기까지 이어진 영남지역 사림들의 영향으로, 당시 유산기의 많은 양이 김종직의 「두류기행록」을 전범으로 한 유산록의 체제[동기-실행-총평의 3단계 구성]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유람의 동기는 속리산이 승경으로 이름이 났기 때문이며, 더욱이 절경인 금강산에 버금가는 ‘소금강’이기 때문에가 가장 많았다. 유람의 계기는 거주지인접이나 근무지인접, 친인척 방문이 주를 이루었으나, 강대연과 같이 단순히 승경만을 위해 유람 길에 오른 경우도 있어서 당시 유람문화가 일반화, 보편화단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속리산 유산기는 총 9편으로, 속리산 유산기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으며, 유람의 동기와 계기, 목적, 서술체계면에서 17세기 속리산 유산기의 양상을 계승하고 있다. 18세기는 시대적인 변화에 힘입어 유람문학에 있어서도 형식적·내용적·문체적 변화가 나타난 시기이다. 그러나 18세기 속리산 유산기에는 이러한 변화의 양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19세기 속리산 유산기도 유람의 동기와 계기, 목적 등에서 이전시대와 별다른 차이점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서술체계면에서 소품화, 간략화 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기존의 사실적, 객관적 위주의 서술에서 서정적, 주관적 위주의 서술이 강화되었다. 또한 속리산의 방문목적이 기존의 승경유람이나 고적답사에서 벗어나 지역문인들과의 교유의 장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 1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속리산을 유람한 유람객들은 시종일관 속리산이 절경인 금강산에 버금가는 ‘소금강’이라는것과 호서제일의 승경이기에 속리산을 방문한다고 하였다. 금강산을 다녀오고 속리산을 방문한 사람들은 속리산의 바위봉우리들과 기암괴석들이 금강산의 만이천봉우리와 닮았다고 하였으며, 다녀오지 못한 사람들은 속리산의 승경에 감탄하며 굳이 천리 길을 나설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속리산에 자리한 법주사, 복천사 등의 주요사찰과 암자는 고려조를 비롯해 조선전기 제왕의 주필처로 유명해지면서 유람객들의 방문과 그에 대한 기록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세조의 복천암 순행(巡幸) 기록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였다. 이렇듯 조선후기 속리산유람은 속리산의 빼어난 승경을 찾아 그것을 향유하며, 아울러 그 곳에 깃든 고적의 답사를 통해 문화와 역사의 현장을 직접 확인하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고 하겠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유람의 양상과 시대별 특징
3. 속리산 유람의 의미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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