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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재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50호
발행연도
2019.3
수록면
73 - 116 (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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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8일에 시작된 목포 만세 시위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 첫째, 목포 시위는 전남에서 일어난 시위 양상의 일부로서, 유사한 패턴을 지닌다. 즉,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시위를 종합할 때, 상대적으로 종교인(개신교/천도교)과 젊은 청년ㆍ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는데, 전남은 특히 종교인 중에서도 개신교인의 참여가 눈에 띈 지방이었다. 목포는 1897년 개항과 함께 전남에서 가장 먼저 선교사에 의한 근대 교육이 시작된 곳이었기에, 두 남장로교 미션스쿨인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둘째, 목포 시위는 크게 두 시위 주체가 있었다. 하나는 종교 배경이 없는 목포청년시위대였고, 다른 하나는 개신교인 시위대였다. 이들은 따로 거사를 준비했고, 시위 공간도 따로 가졌지만, 시위일은 공유한 특이한 구조를 가졌다. 이 개신교인 시위대에는 소속이 상호 교차하는 양동교회 교인과 두 미션스쿨 학생이 함께 했다. 셋째, 두 시위대 공히 일본(2·8독립선언서), 서울(3·1독립선언서), 광주(『조선독립광주신문』)에서 제작된 문건들의 영향을 받았다. 넷째, 목포 만세 시위는 크게 네 차례 일어났다. 1919년 3월 20일에 특정하기 어려운 군중이 일으켰다가 곧 해산한 시위, 1919년 4월 8-9일 양일간 일어난 시위, 1919년 10월에 정명여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짧게 일어난 시위, 1921년 11월에 위싱턴회의에 맞추어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학생이 일으킨 시위였다. 다섯째, 모든 집단 중 여학생, 정명여학교 중고등학생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처음(1919년 3월 20일)을 제외하고, 세 차례 시위 모두에 참여한 집단은 정명여학교 여학생들이 유일했고, 재판 과정에서도 가장 당당하고 거침없는 결기를 보여주었으며, 재판에 회부되어 형벌을 받은 인원도 가장 많았다. 여섯째, 목포 개신교인은 신앙인이 되는 것과 애국자가 된다는 것, 즉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의 결합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이들은 창조주가 모든 민족에게 스스로 통치할 권리와 자유를 부여하셨다는 것을 교리적 당위로 여겼다. 일곱째, 목포 지역 시위에서 선교사들의 참여와 지원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군산을 제외하면, 호남 전역에서 선교사들의 활약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마도 1919년 3월에 남장로교 한국선교회가 두 핵심 선교사를 교통사고로 한 번에 잃는 비극을 겪었던 것, 또한 남장로교 고유의 비정치적 ‘교회의 영성’ 교리가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 선교사였던 영흥교장 다니엘 커밍과 정명 교장 애나벨 니스벳의 존재와 ‘무언의 허용’이 영흥 및 정명학생들이 대담한 만세 시위를 펼치는 데 힘을 보탰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호남지역 3·1운동의 성격
Ⅲ. 전남지역 개신교인의 3·1운동 참여
Ⅳ. 목포 3·1운동: 사건의 재구성
Ⅴ. 미국 남장로교 목포지부 선교사의 역할
Ⅵ. 맺음말
참고문헌
한글초록
Abstract

참고문헌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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