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성환 (국립목포대학교)
저널정보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한국민족문화 한국민족문화 제74호
발행연도
2020.2
수록면
281 - 322 (42page)
DOI
10.15299/jk.2020.02.74.281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1904년 고하도에서 목포 일본영사의 주도로 미국종 陸地棉 시험재배가 이루어졌다. 그 성공은 이후 목포항의 사회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글은 한국지방사 연구의 관점에서 일제강점기 목포항과 면화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것이다.
목포는 일본의 산업화를 위해 원료를 공급하는 거점 항으로 육성되었다. 그 중심에 육지면이 있었다. 1906년 勸業模範場 목포출장소가 설치되고,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육지면 재배가 확대되었다. 생산된 육지면은 일본으로 옮겨가기 위해 목포항으로 보내졌다. 이는 일제강점기 목포항에 공업시설이 들어서는 배경이 되었다. 육지면의 집산과 공업시설의 발달은 1926년 朝鮮綿業共進會 개최로 이어졌다. 이 행사는 목포가 전남의 대표도시로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고, 관련 사회기반 시설이 확대되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陸地棉이 목포항 발전의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은 사실이나, 식민지 항구의 한계점을 보여주는 측면도 많다. 농민들은 재배 기간이 긴 육지면 농사를 선호하지 않았으나, 일본의 식민정책에 의해 강요되는 측면이 있었다. 목포에 공업시설이 늘어나기는 했으나, 정작 규모가 있는 방직공장은 설립되지 않았다. 원료 공급지 기능만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면화 관련 공산품을 목포항에서 역으로 대량 수입해오는 상황이었다. 또한, 목포항의 무역과 국제항로가 기형적인 구조로 고착되는 원인으로 작용했고, 일제강점기 목포에서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사회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시험재배 과정과 이후 전라남도의 생산 현황
3. 육지면 관련 일제강점기 목포항의 기능
4.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과 한계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4)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20-911-000434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