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지현 (광운대학교)
저널정보
사단법인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한국문학과 예술 한국문학과예술 제27집
발행연도
2018.9
수록면
35 - 73 (39page)
DOI
10.21208/kla.2018.09.27.35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백천당(百千堂) 오핵(吳翮)은 1615년(광해군 7)에 태어나 1653년(효종 4) 39세의 나이로 조선 중기 병자호란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오핵은 조선 전기 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천문 · 지리 · 의술 · 병서 등 각종 학문에 능통했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났던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제자로 장유로부터 문장으로 크게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던 문인이었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 오핵에 대한 학문뿐만 아니라 생애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핵은 1633년(인조 11) 19살의 나이로 초시에서 장원을 한 이후 1635년 (인조 13)에도 별시에 장원으로 합격한다. 그러나 과거에 연거푸 장원을 했음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당호 또한 ‘남이 한 번 만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행할 것이며, 남이 열 번 만에 능하거든 나는 천번을 행할 것이다’라는 『중용(中庸)』의 ‘기백기천(己百己千)’을 뜻을 따라 ‘백천당(百千堂)’이라 짓고는『주역』과 『근사록』그리고 역사서 등을 손에서 놓지 않고 공부하였다. 특히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치통감강목』의 형식을 바탕으로 『만세감(萬世鑒)』 4권을 저술하였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오핵은1646년(인조24) 장원급제 후병조좌랑, 세자시강원, 사헌부지평, 사간원 등에 여러 차례 들어갔으나 오래 머물지 않고 곧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그가 환로에 머물렀던 8년 동안 받았던 녹봉은 겨우 2과(科)에 불과했었다. 그의 시는 대부분 기유시(紀遊詩)와 경물시(景物詩)가 주를이루는데 이는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전하는 그의 문집 『백천당유고』에 전하는 그의 시문의 양은 많지가 않다. 현재 전하는 그의 시는 오핵이 서른이 되어서 쓴 작품부터 수록되어 총 90제 94수가 전할 뿐이다. 그리고 그의 산문으로는 묘지명 1편, 발문 1편, 기문2편, 제문1편, 변설2편, 의주문1편, 부3편, 대책문1편이전할뿐이다. 적은 수의 시와 산문이지만, 이 시문을 통해 보면 당시 오핵이 제자백가와 『장자』에 심취했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조선의 17세기 문단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오핵의 생애와 학맥 및 교유관계
3. 오핵의 문학작품
4.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3)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