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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민수 (장원교육)
저널정보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경계 역사와경계 제106집
발행연도
2018.3
수록면
1 - 49 (49page)
DOI
10.52271/PKHS.2018.03.1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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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高句麗 말기 柵城 褥薩이었던 李他仁의 唐 投降 과정과 당 투항 이후 그의 扶餘城의 高句麗 復國運動 진압에 대해 분석하였다. 이타인은 男建이 지휘하는 對唐戰爭에서 자신의 소재지인 柵城에서 후방 지원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타인은 668년 고구려의 부여성 구원군이 薛賀水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당의 총사령관이었던 李勣에게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당군에게 투항한 이타인은 唐軍이 遼東 평원에서 千山山脈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소재한 石城과 고구려의 수도인 平壤城 함락에도 큰 공을 세웠다. 고구려 멸망 이후 이적을 따라서 당으로 간 이타인은 高宗으로부터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從3品인 右戎衛將軍에 제수되었으며, 長安의 萬年縣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후 이타인은 扶餘城에서 발생한 고구려 복국운동을 670년 말에 진압하는 공을 세웠다. 종래에는 檢校東柵州都督府 長史였던 陽玄基가 誅殺한 高定問 주도 하에 발생한 고구려 복국운동의 소재지를 책성으로 파악하여 이타인의 부여성 진압과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669~670년 무렵의 安東都護府의 정세 및 이타인과 양현기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 양자가 진압한 고구려 복국운동은 동일한 실체로 여겨진다. 이타인은 고정문이 부여성에서 일으킨 고구려 복국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同正員 右領軍將軍으로 승격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李他仁의 唐 投降
Ⅲ. 李他仁의 高句麗 遺民 鎭壓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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