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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기범 (한남대학교)
저널정보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충청문화연구 충청문화연구 제19집
발행연도
2017.12
수록면
5 - 43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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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반정정권은 강압으로 왕비를 폐출시켰고, 또 반정공신의 4분의 3이 가짜로 판정되었을 만큼 국정을 농단한 부당한 정치권력이었다. 이에 대해 ‘공론정치(公論政治)’를 내건 사림정치세력이 그들과의 최후의 한판을 벌인 〈위훈삭제〉는 사실상 피해갈 수 없는 현실적 과제였다.
1519년의 기묘개혁에 대해서 사람들은 “기묘명현들은 개혁의 짐이 너무 무거웠고, 또 점진적으로 시행하지도 못하여, 시의(時宜)에 적절치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라 했다. 물론 단기적으로 보면, 그들의 정치개혁운동은 실패했고, 그 주역들은 패배한 개혁운동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들의 개혁운동 중 향약이나 천거제(현량과) 등과 같이 후대까지 살아남았고, 이들의 사림정치는 단기적으로는 패배하였지만, 후일 더 번성하여 선조대에 붕당정치라는 새로운 정치형태로 발전하였다. 또 사화로 피해를 입은 기묘사림들이 모두 신원되고 긍정적으로 재평가 되어졌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그들의 개혁의지와 추진이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시사하는 점이 또한 없지도 않다.
기묘사화로 충암은 개혁의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비명에 갔지만, 후대인들은 그가 옳았음을 입증하고 있다. 폐비신씨의 복위 문제는 신비(愼碑)가 1739년(영조 15)에 ‘온릉(溫陵)’이라는 능호를 받으면서 해결되었고, 충암도 1545년(인종 원년)에 복권되고, 시호를 받고, 또 불천지위의 지위가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신비(愼妃)가 복위될 때까지 부군(충암 김정)의 신주를 땅에 묻지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으로 절사한 그의 아내 송씨부인도 국가로부터 증직을 받고 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모든 일은 반드시 올바른 데로 돌아간다’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을 알게 한다.
퇴계는 “충암(冲庵)의 학문은 사람들보다 한 등급 높다. 이러한 식견을 가지고도 마침내 그 뜻을 펴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라 했다. 이말은 충암의 학문세계와 그 정치적 역량을 다시 평가해 볼 단서를 제공해 준다.

목차

〈한글요약문〉
1. 머리말
2. 충암시대의 사림정치구조
3. 충암의 정치개혁운동
4. 충암의 개혁운동에 대한 후대인의 평가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s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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