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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종대 (중앙대학교)
저널정보
비교민속학회 비교민속학 比較民俗學 第59輯
발행연도
2016.4
수록면
311 - 340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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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우리의 전통문화가 가장 크게 훼손된 때는 일제강점기로 알고 있다. 민족 정체론 등을 근거로 들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문화의 전승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여 왔다. 이런 사실을 토대로 기왕에 우리의 민간신앙에 대한 훼손도 역시 심각한 상태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평가하여 왔다.
이런 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 최근 조사된 양평 성덕리의 당문서를 분석한 결과 매우 의외에 결과를 찾아낼 수 있었다. 성덕리에서는 국수당과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 그리고 첩당, 장승 등이 어우러진 마을신앙을 전승시켜왔다. 특히 국수당 안에는 철마까지 봉안되어 있어서 이 지역에서 솥점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점도 확인된 바 있다.
이러한 신앙형태에 대한 당문서의 내용은 일반적인 유교식 제의 뿐만 아니라, 도당굿이 크게 벌어졌다는 사실까지도 담고 있다. 즉 유교식 제의가 끝난 후 3일 동안 굿청을 마련하여 굿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줄타기 등의 난장이 벌어지고 노름판까지 서는 등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놀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만 해도 엄청나게 큰 판이 벌어져 인근의 사람들까지 모두 참여해서 놀 만큼 대규모 축제가 행해졌다는 것이다. 큰 축제가 이런 산골마을에서 행해진 것은 특징적인 생업방식 때문이다. 즉 양자산을 생업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축제가 성덕리의 마을제의와 결합하여 전승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축제가 일제강점기에도 큰 변화없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는 것을 당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당문서에는 고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서의 순사나 면서기 등을 대상으로 한 접대비가 지출되고 있었다. 특히 순사들이 고창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신이한 경험담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주민들의 고창제를 유지시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1975년의 당문서를 보면 고창제의 제물목록이 확연히 축소되어 나타난다. 굿패를 불렀다는 기록도 사라진 점으로 미루어 도당굿을 행하지 않고 산제사 중심의 유교식 제의만이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미신타파를 내세운 새마을운동이 있으며, 동시에 양자산이라는 생업적 터전을 상실한 인근 주민들의 출입이 끊겼다는 사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덕리의 고창제는 1999년에 양평문화원의 지원을 받아 과거의 고창제를 재현하려고 하였으나 1회성 행사로 그친다. 이후 2005년도 국수당을 개축하고 마을의 신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 작업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목은 없어지고, 신위로 대신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과거처럼 고창을 벌이고자 하는 시도가 있으나, 현재 전승내용은 윷놀이와 사물놀이 패들을 부른 행사용으로 전락한 실정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마을신앙 전승력의 약화동인
Ⅱ. 성덕리 고창제의 전승양상과 변화
Ⅲ. 마을신앙의 전승과정을 통해본 변화와 그 이유
Ⅳ. 결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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