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변남주 (목포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5권 제1호
발행연도
2012.5
수록면
73 - 110 (38page)
DOI
10.17068/lhc.2012.05.15.1.73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영산강 상류지역까지 바닷배(이하 해선) 뱃길에 관하여는 지명과 전언을 반영한 긍정적 견해가 일반적이다. 조선 시기를 중심으로, 역사적으로 검토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광주지역에서 조선시기 문헌상으로 확인된 포구는 총 8개소로 浦가 1개소이고, 나루 [津ㆍ渡]는 7 개소이지만 사실은 총 6개소였다. 그 위치는 모두 조수의 한계를 벗어나 있어 浦가 아닌 나루의 기능만 하였다. 또 혈포는 해선이 출입했던 浦가 아닌 것으로 보았다. 뱃길의 환경에서 수심은 나주대교 인근과 그 상류는 홍수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1m를 넘지 않았으며, 홍수기에는 강물의 흐름이 빨라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또 여울을 통과하기 위한 방법으로 갯골을 파거나 강가에서 배를 인력으로 끄는 방법이 있는데 영산강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또 해선 뱃길에 결정적인 장애물인 교량이 영산강 본류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다. 조선시기의 경우 영산진에 ‘영산대목교’, 나주읍성 동문밖 광탄에는 광탄교, 그리고 서창의 하류에 극락교와 생압교가 있었다. 영산강에서는 조수가 미치지 않는 상류를 다니는 강선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다. 또 조선시기 광주 외 상류 지역에는 조운창이 개설되지 않아 세곡을 법성포나 나주 영산창에 납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세 대상 선박도 보유하지 않았다. 이상 역사적으로 영산강 상류 뱃길을 살펴본 결과 조선시기에 해선에 의한 수운이 이루어졌다는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영산강 상류 지역에는 해선과 관련된 浦는 존재하지 않고, 津ㆍ渡는 모두 도강처나루 기능만 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목차

[초록]
1. 서론
2. 조선시기 광주지역 포구의 위치 고증과 해석
3. 물길 환경으로 보는 상류 뱃길 여부
4. 江船의 존재와 조운ㆍ전세에 나타난 뱃길
5. 결론
[참고문헌]

참고문헌 (39)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