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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경옥 (목포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6권 제1호
발행연도
2013.5
수록면
95 - 124 (30page)
DOI
10.17068/lhc.2013.05.16.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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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진도 송산리 마을문서를 통해 도서지역 洞契?學契의 운영을 살펴본 사례연구이다. 진도지방의 先住姓氏는 창녕조씨로, 고려 공민왕 때 군내면 정자리에 鴨鷗亭을 지어놓고 살았다고 한다. 그 뒤를 이어 밀양박씨가 入島하여 15세기 진도군을 復郡하는데 공을 세웠다. 송산리의 경우 16세기에 현풍곽씨와 경주이씨 등이 입도하여 정착하였다. 이들은 19세기에 진도를 대표하는 성씨로 급성장하였다. 그 이유를 18~19세기 진도 송산리 마을 공동체 조직인 동계와 학계를 통해 규명 하고자 한다.
18세기 송산리 洞契는 경주이ㆍ창녕조ㆍ밀양박?현풍곽씨 등 4姓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선주성씨인 창녕조씨가 현저하게 감소하고, 밀양박씨가 새롭게 부상하였으며, 이주성씨인 현풍곽씨와 경주이씨가 동계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다. 19세기에 송산리 사람들은 學契와 書堂을 창설하였다. 초창기 송산리 학계는 오직 마을 주민들에게만 가입을 허용하였다. 왜냐하면 송산리 학계는 마을 공동체 기금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송산서당은 현풍곽씨 松庵 郭震權과 그의 제자 경주이씨 益雲 李純?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이들은 학생을 마을 주민으로 국한하지 않고, 진도 전역에서 선발하였다. 그리하여 20세기 초에 송암과 익운의 문하에서 17명의 面長이 배출되었다. 이처럼 18~19세기 송산리 동계ㆍ학계는 마을 공동체 조직의 기반이었고, 나아가 진도 전역에서 향촌 구성원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는 원동력이었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공간과 자료 : 송산리 마을문서
3. 송산리 주민들의 入島와 定着
4. 洞契의 조직과 구성원
5. 學契의 창설과 서당 운영
6.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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