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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정욱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3집
발행연도
2009.8
수록면
227 - 264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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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써 ‘內鮮一體’를 표방하는 ‘皇民化’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런 정책은 유림에게도 적용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 10월 16일 전국적인 유림단체인 조선유도연합회를 조직한 후 각도 연합회와 지부를 결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1939년 11월 14일 충청북도 유도 연합회가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1941년 3월 12일 강원도 유도연합회의 결성까지 전국 각도별 조직이 완료되었다. 조선유도연합회는 일제강점기 마지막에 등장한 최대의 유림단체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관변단체였다.
‘총동원체제’의 철저한 통제정책 아래에서 항일의식을 여전히 견지한 일부 유림은 은거하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유도연합회는 주로시국 강연과 각종 강연 및 강습에 힘을 쏟았다. 이는 유림과 일반 민중의 정신적 동요를 막는 동시에 일본 제국의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세뇌를 시키려는 의도였다. 조선유교연합회의 활동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한것이 이른바 ‘황도유학’이었다.
‘황도유학’은 일본 식민주의 관학자 高橋亨에 의해 본격적으로 공론화 되었다. 高橋亨이 주장한 ‘황도유학’은 일본의 신국사상, 즉 천황이 정점에 있는 神道가 유교와 결합되어 이루어진, 忠孝一致의 일본화 된 유교를 의미하였다. ‘황도유학’을 주창한 목적은 조선 민중이 일본의 침략전쟁에 자진하여 인적ㆍ물적 자원을 바치도록 하는 정신과 태도를 갖게하는 것이었다. 日帝協力儒林인 안인식과 이명세는 이런 ‘황도유학’을 더욱 확대하고 포장하였다. 안인식은 일본의 국체와 유학을 결합시킨 충효일치의 일본화 된 유학에 다시 공자의 대동사상을 연결시켜 일제의 소위 대동아전쟁을 합리화시켰다. 이명세는 태평양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일 뿐만 아니라 동양을 위한 숭고한 義戰으로 격상시켰다.
안인식ㆍ이명세 등은 조선의 유림에게 조선시대에 이룩한 난숙한 경지의 성리학을 버리고 일본화 된 유교, ‘황도유학’을 수용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일본천황과 일본제국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헌신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유교와 유림에 대한 환멸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미 위축된 유교는 사실상 재기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다. 일제협력유림이 주장한 ‘황도유학’은 전시대에 이룩한 높은 수준의 유학사상의 단절을 초래하여 한국 유학사상의 발전적 흐름을 끊은 악영향을 남겼다.

목차

1. 머리말
2. 조선유도연합회의 결성과 활동
3. ‘황도유학’의 등장과 전개
4.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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