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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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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韓國史學報 제23호
발행연도
2006.5
수록면
191 - 235 (4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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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재기하면서 나주 향리층은 위기를 맞게 된다. 의병이 발발할 무렵 나주 향리층 가운데는 主事나 郡守 등으로 친일정부의 관직에 진출해 있던 인물이 적지 않았고, 그러한 관직은 의병들의 주요한 공격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의병활동에 대한 향리층의 대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의병에 투신한 부류이며, 소수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여전히 일제의 침략정책에 따른 사회질서의 변화에 편승하여 적극적으로 관직에 진출하거나. 사회ㆍ경제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는 아들은 의병장으로 활동하고 아버지는 의병의 공격 대상이던 신식학교의 學務委員으로 활동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의병에 가담하지 않은 향리층은 의병과 심각한 대립을 피했다. 이들은 일제가 의병진압을 위해 강제로 결성한 〈自衛團〉에 들어가 활동하기를 꺼렸다. 그 대신 나주의 향리층은 〈羅州郡民會〉 창설하였다. 의병과 극단적인 대립을 회피하고, 〈자위단〉 창설을 요구하는 일제 관헌의 압박도 어느 정도 무마시키려는 의도였다. 또한 나주 향리층과 의병 간에는 서신 교환 등 적지 않은 교류가 있었다. 나아가 이들은 향리출신 의병장에게 총기와 금전, 군량미 등을 제공하기도 했다. 의병장들 역시 향리층에게 극단적인 공격을 가하기 않았고, 나주의 유력 인사가 다른 의병부대에 잡혀갔을 때는 주선하여 그를 석방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의병전쟁이라는 격동과 위기의 상황 속에서 의병과의 극단적 대립을 회피하여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고, 자위단 창설을 요구하는 일제 관헌의 압박도 모면함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나려는 향리층의 노력이 표현된 것으로 여겨진다.

목차

〈국문 초록〉
1. 머리말
2. 나주 지역 의병활동과 향리출신 의병장
3. 의병활동에 대한 향리층의 대응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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