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문서학회 古文書硏究 古文書硏究 제40권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81 - 109 (29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학성이씨는 15세기에 鄕吏 출신인 이예(1373~1445)의 공로로 면역을 허락받았으나 일부만 士族으로 전환하고 일부는 울산에서 그대로 향리직을 수행하였다. 이후 향리 가계는 사족 가계와 마찬가지로 항렬별로 돌림자를 사용하는 등 부계의식을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돌림자가 소멸하였다. 더불어 武科에 급제하여 사족으로 전환하거나 免鄕하여 鄕吏를 벗어날 자격을 인정받았다. 免鄕한 가계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호장, 기관을 담당하다가 1660년을 마지막으로 향리직에서 이탈하여, 1668년에 최초로 간행된 족보에 이예의 적계 후손으로 수록되었다. 15세기에 이예의 후손이 士族과 吏族으로 분화한 것은 울산 지역에서 吏族의 위상이 士族과 대등했음을 알려준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학성이씨 향리가계에서 돌림자가 사라진 것은 향리의 위상의 하락으로 향리가계가 정체성을 포기하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사족 주도로 족보 편찬이 이루어진 것은 향리의 위상이 더욱 하락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향리직에서 이탈하여 사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에 ‘면향’한 이후에도 향리직을 수행해 오던 가계마저 더 이상 호장과 조문기관을 내지 않고 족보에 등재됨으로써 사족의 위상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22)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