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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현강 (한남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3호
발행연도
2010.9
수록면
35 - 56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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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레이놀즈의 선교 생애에서 현장 목회 분야는 여타의 다른 사역과 비교할 때 아직 조명이 덜 된 분야에 속한다. 그는 성경번역가와 조직신학 교수로서의 이미지를 강하게 갖고 있다. 하지만 레이놀즈는 기본적으로 목회자였다. 그의 선교사로서의 진면목은 역시 일선 목회와 복음 사역을 통해 가장 잘 확인된다. 그래서 이 논문은 그의 일선 목회 활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았다.
1892년 다른 6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내한한 레이놀즈는 먼저 서울에 머물면서 남장로교의 호남 선교를 전반적으로 기획하였다. 그는 1894년 전라도 전체를 둘러보는 선교 여행을 통해 지역 상황을 점검하고 스테이션 설립 후보지를 물색하였다. 또 전주와 목포의 부지를 매입하여 향후 스테이션 기지로 활용했다. 레이놀즈는 호남 선교를 준비하면서 서울에 머문 몇 년 동안 승부재 사역에 몰두했다. 즉 서대문 부근에 있었던 자신의 주택을 예배당으로 개방하고 매주일 집회를 열었다.
1897년 봄 레이놀즈는 전주를 방문한 후 테이트 등 전주스테이션 선교사들의 제의에 따라 전주 이주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해 6월 가족과 함께 전주로 이사하여 전주교회에서 목회하기 시작했다. 레이놀즈의 전주교회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무렵이었다. 그 해 봄 레이놀즈는 모두 10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1900년 6월 안식년으로 떠나기 직전 전주교회는 평균 50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다. 성경번역으로 인해 1902년 이후 서울에 거주하던 레이놀즈는 1908년 2월 전주교회에 다시 부임하였다. 그는 전주교회에 제직회를 구성하여 한국인 교인들을 조직화하는 한편 열정적이고 유창한 설교와 부흥회 그리고 성경공부를 통해 교회의 성장을 주도하였다.
1908년부터 전주에 상주하게 된 레이놀즈는 전주교회와 아울러 전주 인근의 교회들을 담당하는 전북 지방의 사역자로도 활동하였다. 김제군 동편과 금구ㆍ고부ㆍ흥덕 지방이 그의 담당 구역이었다. 1909년의 경우 레이놀즈는 이곳의 15개 기독교 공동체를 순회하며 돌보았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신봉자였던 레이놀즈는 1913년부터 지역교회들을 대상으로 자립(Self-Support)의 방법을 적용하였다. 결과적으로 레이놀즈의 지방은 전주스테이션 내에서 자립한 교회가 되었다.
레이놀즈는 1903년부터 승동교회 목사로 3년간 시무하였다. 북장로교 서울스 테이션 전도위원회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던 것이다. 또 그는 1906년 3월부터 1907년 8월까지 북장로교 선교사 게일을 대신하여 연동교회를 담임하였다. 레이놀즈는 평양에 살면서도 계속해서 목회 사역을 이어 갔다. 그는 주일에 신학교 채플과 오후의 영어예배를 인도했고, 그 외에 평양 부근의 와산교회와 고정교회를 담임하였다.

목차

1. 머리말
2. 선교 준비 활동(1892~1896)
3. 전주교회 목회 사역(1897~1900/1908~1912)
4. 전북지역 목회사역(1908~1921)
5. 서울ㆍ평양 목회 사역(1903~1907/1921~1937)
6. 맺음말
참고문헌
한글초록
Abstract

참고문헌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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