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56
발행연도
2009.12
수록면
301 - 336 (36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학계에서는 통설적으로 진지왕의 폐위와 진평왕의 즉위가 계파적 정치 집단 간(왕실과 귀족집단 또는 동륜계와 사륜계)에 나타난 갈등의 결과라고 파악한다. 그러나 이 사건을 갈등론적 시각에서 접근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련의 행적들이 나타난다. 우선 진지왕의 폐위 과정에서 대립상이 발견되지 않고, 그의 아들 김용수는 친부와 달리 왕실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정치적 위상을 꾸준히 유지하였다. 더불어 폐위를 주도한 국인들이 직접 왕위에 도전하지 않고, 약관의 백정을 신왕으로 추대한 것 등은 정치권력의 속성상 이례적이다.
이러한 납득하기 어려운 일련의 상황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노력 가운데 당시 상황을 주도 내지 조정할 만한 인물을 찾아 낼 수 있었으니 바로 만호부인이다. 주지하다시피 만호는 진흥왕의 여제이자 동륜태자의 부인이었으며 진지왕의 고모였고 약관의 나이에 즉위한 백정의 친모였다. 그런 까닭에 동륜계의 수장격인 진평왕과 사륜계의 수장격인 진지왕에 대한 혈연적 포괄성을 지녔고, 이를 기반으로 양자의 왕위 교체를 극심한 갈등없이 원만하게 유도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수의 미래도 보장받았을 것이다.
동시에 그녀는 진평왕대 초기 요직을 차지했던 일련의 지증왕계 인사 노리부 김후직 수을부 등에 대해서도 계보적 우위를 지녔다. 그러므로 그의 어린 아들 백정을 신왕으로 즉위시킬 수 있었고, 섭정을 통해 국인들의 발호를 제어할 수 있었다. 진평왕대 초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완성을 위한 관제 신설이나 인원 확충 등의 정치 개혁이 진행되었던 것도 귀족의 권익 향상 보다는 왕권의 신장을 도모하려는 만호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당시 진평왕의 즉위에 조정자로서 만호의 존재와 역할이 충분히 인정될 만하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眞平王의 卽位와 國人
Ⅲ. 眞平王과 金龍樹
Ⅳ. 眞平王과 萬呼夫人
Ⅴ. 맺음말
참고문헌
日文抄錄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0-911-001680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