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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1호
발행연도
2009.9
수록면
69 - 93 (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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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지역의 기독교 선교는 다른 지역과 달리 미북감리교, 남장로교, 침례교, 성결교 등이 기독교 전파 초기부터 이 지역의 기독교 형성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다양한 교파 교회가 혼재하는 현상은 충청남도 중에서도 강경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글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강경에서의 다양한 교파교회의 전래와 수용 과정을 살펴보고 이 지역의 교회들 간에 상이한 전통이 형성되어 가는 이유를 분석하는데 목적이 있다.
강경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침례교 신앙은 미국 보스턴 소재 엘라씽기념 선교회 선교사들에 의해서 전달되었다. 침례교회에 이어 강경에 두 번째 설립된 장로교회는 선교지역 분할협정 때문에 1913년 감리교회에 이양됨으로써 더 이상 존속하지 못했다. 장로교가 사라진 상황에서 선교활동의 차이는 침례교와 감리교 사이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침례교 선교사들은 역사의 진보를 비관적으로 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교육받았고, 또 오지선교 정책 때문에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소홀히 했다면 감리교회는 교육선교(만동학교, 만동여학교, 유치원), 청년선교(엡웟청년회와 기독교청년회) 등을 통해서 지역사회와의 유대관계를 강화시켜 나갔다. 게다가 1913년 장로교로부터 황산교회를 이양받음으로써 감리교회는 교회 조직에서나 선교활동에서나 강경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교회로 발전해가기 시작하였다.
침례교 선교사들은 감리교 선교사들처럼 폭넓은 사회선교 활동을 펼치지는 못했으나 강경에서 교단을 조직할 만큼 강경의 침례교회는 1900년대 초부터 침례교 발전의 중요한 신앙공동체로 성장해 갔다. 동양선교회로 시작된 강경의 성결교회는 기독교청년회(YMCA) 활동을 통해 다른 교파의 교회들과 협력관계를 맺었는데, 이 점에서 침례교와 달랐다. 이런 차이는 당시 성결교회와 침례교회를 이끌고 있던 토마스와 펜윅에게서도 나타났다. 강경성결교회의 특수한 경험은 교회 창립 다음 해에 토마스 선교사 구타사건을 통해 일제 경찰로부터 어려움을 겪었으며, 수년 후에는 강경공립보통학교에 다니는 교회학교 학생들과 교사가 학교에서 원하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퇴교당한 일이었다. 신사참배 거부는 여전도사 백신영의 영향 하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백신영은 3ㆍ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 후원과 군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약하다가 투옥된 인물이었다.

목차

1. 머리말
2. 침례교회의 출발지
3. 감리교회의 발전과 교육사업
4. 일제와 충돌 겪은 성결교회
5.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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