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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21號
발행연도
2004.6
수록면
1,139 - 1,162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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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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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에서 南北朝는 一揆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이 시기의 「下松浦 一揆」는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고 있다. 이 一揆 契約狀에는 몇 가지 一揆 결합의 목적이 명시되어 있다. 대체로 一揆 구성원들이 군사행동을 통일하거나 상부상조를 맹약한다는 것과 구성원간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으로 요약해 볼 수가 있다. 즉 남북조 내란기의 幕府 분열과 在地 지배의 혼란으로 下松浦지역의 小領主들은 상호 분열을 방지하고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단합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지역 小領主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주체적 의지에 의해서 결실을 본 것이 「下松浦 一揆」의 계약장이다.
한편 이 一揆 계약은 「다수의 결정(多分仰)」이라는 방법을 통해 문제를 자치적으로 해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또 「중재 재판(左博)」을 보다 확대 발전시킨 기능인 「所務沙汰」ㆍ「雜務沙汰」ㆍ「檢斷沙汰」 등의 재판 기능과, 「人身支配」의 기능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 절차상의 기능은 상호간의 마찰로 빗어진 소송을 鎭西管領이 재판하기 전에 領主들의 타협으로 판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公的 권력의 기능을 대신하는 在地 무사들만의 「空間」을 설정하였고, 이것을 바탕으로 在地 지배권을 확립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또 특징적인 점은 在地 무사들이 스스로를 지켜나가는 自救努力과 「平等」ㆍ「無緣」 기능의 창출이었다. 특히 평등 의식은 一揆 집단 내부에서 구성원간의 「衆議」와 「다수의 결정(多分之儀)」이라는 의사결정의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집단내부에서의 자율성을 기본으로 유지해 나갔다. 나아가서는 혈연에 기초했던 「緣」의 관계를 단절함으로서 구성원간에 「平等」과 「無緣」의 場을 설정하고, 사회 통념을 초월하는 「公開」의 원리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중세의 「下松浦 一揆」가 갖는 지역 지배의 자율적 원리인 것이다.

목차

요약
Ⅰ. 序言
Ⅱ. 「다수의 결정(多分之儀)」과 공동 해결 - 應安 6년(1373)의 契約狀
Ⅲ. 公ㆍ私의 충절과 「人返し」규정 - 永德 4년(1384)의 契約狀
Ⅳ. 「平等」과 「道理」의 관념 - 嘉慶 2년(1388)의 契約狀
Ⅴ. 「吹學」와 「御成敗式目」의 답습 - 明德 3년(1392) 契約狀
Ⅵ. 結論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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