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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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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19號
발행연도
2003.6
수록면
241 - 253 (1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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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조 내란기에 足利直冬과 一色範氏가 구주를 떠나자, 1360년대 남조는 구주에서 대세력을 형성하고 황금시대를 맞고 있었다. 한편 북조의 막부는 應安 3년(1370) 今川了俊을 九州探題로 임명하여 구주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了俊은 구주에 상륙하자마자 守護와 재지 무사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정책을 펴 나갔다.
了俊이 구주에서 세력의 규합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그가 부임하기 이전의 치밀한 준비와 부임 이후의 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了俊은 부임하기 이전에 備後ㆍ安藝의 守護가되어 中國 지방에서 군사력 기반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備後ㆍ安藝의 재지 무사와, 大友氏 및 石見ㆍ周防ㆍ長門의 재지 무사들을 주요한 군사력으로 편성하였다. 둘째, 了俊은 구주의 재지 무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書狀을 적극적으로 발급하며 세력을 규합하였다. 셋째, 막부도 了俊의 九州探題 임명을 구주에서 열세 만회의 전기로 삼기 위해 재지 세력의 규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넷째, 了俊은 군사력으로 일족을 중심으로 하는 直轄軍과 비혈연의 군사력도 끌어들여 강력한 무력으로 편성하였다.
또한 了俊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대립관계에 있던 筑前의 전통적인 守護 少貳冬資를 유인 살해하는 정치적 과단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了俊의 부탁을 받고 冬資를 함정에 끌어들였던 島律氏의 이반은 了俊에게 있어서 하나의 정치적 시련이었다.
冬資의 살해 사건 이후 了俊은 島律氏의 근거지인 大隅와 薩摩가 위치한 남구주를 장악하기 위해 새로운 정책을 펴게 되었다. 永和 2년(1376) 아들 滿範을 薩摩ㆍ大隅ㆍ日向 3개국의 대장으로 파견하고 島律氏를 공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永和 3년(1377) 10월 남구주 지역에서 肥後ㆍ薩摩ㆍ大隅ㆍ日向의 재지 무사 61명이 「南九州國人一揆」를 결성한다.
이 一揆는 재지 무사들의 주체적인 의지와 자율적 요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지역적 결합체이었다. 미리 島律氏의 항복이라는 현실적 과제에 대처하기 위해서 재지 무사들이 스스로 만든 것이다. 또한 「南九州 國人一揆」는 남구주 일대에서 재지 무사(國人)들이 결성하여 了俊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了俊의 구주 지배에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목차

요약
Ⅰ. 序論
Ⅱ. 室町幕府의 九州探題 人選
Ⅲ. 幕府의 探題 지원과 今川了俊의 군사조직
Ⅳ. 今川了俊의 政治 工作과 「一揆」의 성립
Ⅴ. 結論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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