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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순우 (군산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 제91호
발행연도
2024.8
수록면
175 - 204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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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려~조선시대 발해인 영순태씨(永順太氏)의 시조(始祖) 대금취(大金就)와 중흥조(中興祖) 태두남(太斗南) 관련 기록을 검토하고 행적을 재구성하였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발해인들의 거주지역이 확대되는 양상이 확인되는데, 그중 단연 돋보인 지역은 상주목-영순현이다. 이 지역 영순태씨 발해인들은 고려 말에 이르러 ‘향리(鄕吏)’가 되면서 통치 체제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村) 사람 중 태씨(太氏) 성을 가진 자가 적을 잡은 공로로 영순군에 봉해졌는데, 영순태씨 발해인들은 그 인물이 대금취(大金就)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 중종대 태두남에 의해 ‘대금취=영순군(永順君)’이라는 도식이 공식화되었다. 한편 영순태씨를 반석에 올려놓기 시작한 태두남에 대해서는 사뭇 다른 두 갈래의 평가가 있다. 관찬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평범한 관료에 불과하지만, 조선후기 영남지역 문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대단히 강직하고 바른 사람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스승 김양진이 죽자 모두 나아가기를 주저할 때 홀로 나아가 스승의 장례를 극진히 모셨던 것에서 그의 성품이 드러난다고 할 것이다. 태두남의 후인들이 뿌리를 내린 예천 일대는 이름난 명문들이 많은 곳으로서 태두남의 후손들 역시 그들과 호흡하며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들이 적극적으로 선대의 기록을 취합해 족보편찬을 위해 노력한 점도 당대의 사회를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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