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명섭 (단국대학교)
저널정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동양학 동양학 제96호
발행연도
2024.7
수록면
153 - 172 (20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글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로 외교권을 빼앗긴 데 대한 일반 민중의 분노를 대변해 이토 히로부미를 돌팔매로 응징한 원태우(1882~1951)의 의거를 조명한 논문이다. 원태우에 대한 생애사와 1905년 11월 22일 안양역 의거에 대한 관련 자료를 검토하여 사실 복원과 함께 역사왜곡의 실상을 파악해 의 거의 위상을 조명하고자 하는 첫 시도인 것이다 . 이번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 중 첫째는 현재의 국가보훈부 공훈록에 기재된 ‘원태근’은 사실과 다르며 이명도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 그를 농촌 출신의 농민, 또는 학식 없는 ‘날품팔이’ 노동자로 비하하는 일 본의 기록은 객관적 근거가 아니며, 유생이라는 후손의 주장에 더 설득력이 있다. 더욱이 사망일도 1950년 6 월 25일이 아닌 1951년 7월 22일로 밝혀져 관계기관의 기초정보 수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둘째, 이토 히로부미 응징 의거 이후 원태우를 처음 조사한 일본 헌병대는 그를 ‘원태근, 20세’로 잘못 기술 해 역사왜곡을 주도하였다. 이토 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일지에 따르면, 이토 대사를 노린 원태우의 돌은 차창 을 깨고 떨어져 얼굴의 5곳에 상처를 입혀 출혈을 일으켰다. 이에 급히 호위 헌병이 내려 밤 9시반 원태우 등 4명을 체포했다. 셋째, 이토 대사는 원태우의 의거를 ‘술 취한 자의 장난’으로 고의가 아니라며 변호하여 감금 2개월과 태형 100대의 처분을 내렸지만, 이는 한국민의 또 다른 저항을 두려워한 조치라 할 수 있다. 을사늑약에 대한 또 다른 분노와 저항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이토 대사는 정식 조사나 재판과정 없이 헌병대 조사만으로 축소· 은폐하면서 일체의 언론보도를 통제하였고, 관련 자료를 남기지 않도록 했다. 대신 일본은 2개월 동안 심각한 고문을 가하여 온몸에 고문을 가해 흉터를 남겼으며, 특히 성기 고문을 가해 성불구자가 되도록 하였다. 넷째, 고문 흉터와 성불구자 신세에도 불구하고, 원태우는 혼인을 약속한 처자와 결혼하였고, 고문 후유증 으로 어렵게 생활하다가 1951년 7월 22일 사망하였다. 생업을 구할 수 없었던 원태우는 석수쟁이의 일을 도우 며 소일하였고, 맏형의 둘째아들을 양자로 삼아 후사를 이어갔다. 원태우는 1950년 6월 25일이 아닌 1951년 7월 22일 70세의 일기로 사망하였고, 유해는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화장해서 안양 강가에 뿌려졌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