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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안영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중어중문학회 중어중문학 中語中文學 第97輯
발행연도
2024.9
수록면
111 - 137 (27page)
DOI
10.46612/kjcll.2024.09.9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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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72년 3월 22일 〈해방일보(解放日报)〉에 실린 광고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상하이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광고였는데, 당시 유행하던 모범극과 ‘항미원조’영화 광고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72년을 전후로 ‘항미원조(抗美援朝)’영화의 소환은 국제적 고립으로부터의 탈주를 위한 선제적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60년대 중소 국경분쟁이 구체화 되면서 기존 위협국인 미국에 더하여 소련에 대한 경계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중국은 국제적 고립상태에 처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선택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었고, 이를 위해서 중국과 사회주의 특수관계를 맺은 국가들, 특히 미국을 주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 국익차원에서 대미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설득시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1972년 3월 22일 배열 광고면에 실린 것은 영화뿐이 아니었다. 당시 유행하던 모범극도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항미원조서사를 담은 모범극 〈백호단기습(奇襲白虎團)〉도 있었다. 이 작품은 그 해 9월 모범극영화 〈백호단기습〉으로 만들어져 전국에 걸쳐 상영되었다. ‘항미원조’서사가 정전화된 가장 전형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1975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갈 무렵에 제작되어 상영된 항미원조 제재 영화들은 중국이 어떤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가를 명확히 담고 있다. 당시 영화 속에는 “지구상에서 계급과 사유제도를 없애고 인류 최고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국가”의 이미지를 담고자 했다.

목차

1. 서론
2. 1972년, ‘항미원조’ 기억의 소환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뤄졌는가
4. 결론
參考文獻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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