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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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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주강수 (경상국립대학교)
저널정보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南冥學硏究 南冥學硏究 제77호
발행연도
2023.4
수록면
25 - 58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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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白雲洞에 있었던 ‘白雲精舍’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추적하여, 그 공간에 투영된 인식의 변모양상과 그 의의를 규명하기 위해 쓴 것이다. 백운동은 南冥 曺植(1501~1572)이 세 차례나 유람하며 은거하고자 했던 공간이었다. 이후 19세기 말, 지역 인근 유학자들은 남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유행처럼 이곳을 찾았다. 白雲洞 三君子라고 불렸던 愚山 韓愉(1868~1911)‧澹山 河祐植(1875~ 1943)‧溪齋 鄭濟鎔(1865~1907) 역시 백운동을 찾아와 백운정사를 지으려 하였다. 이는 위태로운 나라의 상황 속에서 지역의 선현인 남명의 유적지를 찾아 백운정사를 지어 남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강학을 통해 유학의 도를 일으켜 세우려는 의지를 표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뜻을 완전히 이루지는 못하였는데, 이후 한유의 후손과 간재학파 중심의 백운정사 유생들이 백운정사를 건립하였다. 백운정사 유생들이 백운정사를 건립한 까닭은 한유의 뜻을 계승하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서는 당대 노론계 巨儒이자 한유의 마지막 스승이었던 田愚와 연결을 시켜야만 했고, 전우의 문인에게도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였다. 예컨대, 전우에게 「白雲精舍銘」을 받고, 전우의 핵심 문인이었던 石農 吳震泳(1868~1944)과 欽齋 崔秉心(1874~ 1957)에게 백운정사에 관한 글을 받기도 하였다. 艮齋學派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백운정사는 강우지역 간재학파의 대표적 거점 공간이 되었다. 백운정사 유생들은 宋時烈이 짓고 전우가 글씨를 쓴 「남명신도비명」을 목판으로 찍어내기도 하고, 전우와 한유의 영정을 봉안하여 추모 공간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그간 남명과 큰 접점이 없던 간재학파가 백운동을 점유하게 된 것은 1926년 이후 남인 계열 학자들이 남명과 관련된 유적지에 관심을 끊었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운정사는 남명학 계승공간이라는 초기의 의도와는 달리, 艮齋學을 중심으로 유학의 도를 부지해나가고 선대와 스승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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