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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수창 (摩聖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저널정보
대각사상연구원 대각사상 대각사상 제26호
발행연도
2016.12
수록면
9 - 40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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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峰庵의 太古宗祖論을 다룬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불교의 종명과 종조문제를 다룬 연구논문은 많이 발표되었다. 뿐만 아니라 金映遂의 太古宗祖論, 方漢岩의 道義宗祖論, 佛化 李在烈과 法雲 李鍾益의 普照宗祖論 등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봉암의 태고종조론은 본고가 처음이다. 근현대한국불교사에 圓宗, 臨濟宗, 朝鮮佛敎禪敎兩宗, 朝鮮佛敎曹溪宗, 朝鮮佛敎, 朝鮮佛敎禪宗, 韓國佛敎曹溪宗, 大韓佛敎曹溪宗 등의 宗名이 나타난다. 이처럼 많은 宗名이 나타나는 것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는 敎團의 명칭을 찾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근현대한국불교사는 종명과 종조의 변천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宗名?宗祖?宗旨?宗風은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의 諭示에서 비롯된 불교계의 法亂 渦中에 禪學院側 비구들이 1954년 9월 28일과 29일 양일간 선학원에서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하여 普照知訥(1158-1210)을 宗祖로 내세우는 종헌을 개정하였다. 이 사태를 목격하고 당시 宗正이었던 曼庵 宋宗憲(1876-1956)은 ‘換父易祖’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종정직을 사퇴하였다. 당시 峰庵 邊月周(1909-1975)는 선학원측에서 宗祖를 바꾸어 버린 것에 대해 크게 분개하였다. 그가 龍城震鍾(1864-1940)의 直系弟子였음에도 불구하고, 總務院側(帶妻側)에 가담한 것도 바로 이 종조문제 때문이었다. 봉암은 1954년에 시작된 승단분규 이전에는 禪學院側에 몸담고 있었다. 봉암의 나이 33세 때인 1941년 3월 16일 선학원 중앙선원에서 개최된 「朝鮮佛敎禪宗」 第二會 定期禪會에서 중앙종무원의 庶務理事로 선출되었다. 그만큼 그의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54년 9월 선학원측 비구들이 普照知訥을 宗祖로 내세우자, 비구승 측에서 대처승 측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그리하여 봉암은 통합종단 출범 직전인 1962년 1월 31일 제4차 불교재건위원회에서 佛敎再建非常宗會 法輪寺側 종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韓國佛敎曹溪宗(宗正 鞠?潭)의 宗會 副議長으로 재직하였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종조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宋曼庵 宗正을 존경하였으며, 鞠?潭 종정을 모시고 끝까지 선학원측 비구들과 대립하였다. 그는 이 종조문제 때문에 같은 龍城門徒인 사형사제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또한 그는 1954년부터 1972년까지 계속된 승단분규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海印寺에서 설립한 馬山大學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들을 위한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가 못다 이룬 悲願을 계승하는 것은 그의 문도와 후학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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