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기흥 (건국대학교)
저널정보
건국대학교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 통일인문학 제61집
발행연도
2015.3
수록면
371 - 401 (31page)
DOI
10.21185/jhu.2015.03.61.371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신라는 5세기에 이르러 국가체제를 확고히 하고 정체성을 강화면서 전통적 조상신인 태양신을 인격화하여 시조로 숭배하고자 하였다. 피장자가 확실치 않은 오래 된 무덤들을 개보수하여 조상신인 혁거세의 무덤이 포함된 오릉으로 조성하였던 듯하고(435), 신화상 그의 탄생처에 신궁을 세워(487) 숭배하며 인격화를 한층 진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왕실이 직계 조상을 더욱 숭모해가는 중에, 불교가 공인되는(528) 사실까지 있게 되면서 혁거세 숭배는 식어갔다. 그리하여 『국사』 가 편찬될 때(545) 그는 역사적 시조로 자리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진흥왕 중기 이후, 국력 성장과 국제정세의 변화에 힘입어 대외정책을 일대 전환하여 백제 고구려와 대결을 불사하며 대대적 영토 확장을 이루어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현실의 변동은 역사의식의 변화를 수반하였다. 진흥왕은 신라의 건국이 고구려와 백제보다 앞선 것으로 하고자 하였던 듯하다. 더구나 그는 신선 등 전통사상에 우호적이라서 혁거세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 『국사』 편찬 시 시조 남해차차웅의 부신(父神)으로 말해졌을 혁거세는, 개편작업을 통해 인격적인 역사적 시조로 기술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 뒤 그는 전통적 조상신도 아니고 역사적 시조로서의 위상도 취약하여 국가적으로 제한적인 숭배를 받는데 그쳤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오릉(五陵) 조성
3. 신궁(神宮) 설치
4. 역사적 시조로의 정립
5.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3)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6-001-0013195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