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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인성 (충남대학교)
저널정보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백제문화 백제문화 제56호
발행연도
2017.2
수록면
367 - 388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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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가운데 왜 백제만이 원지 축조 기록이 있을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백제는 도읍을 정한 곳마다 즉 한성, 웅진, 사비에 각각 원지를 축조했다는 점은 궁금증을 더했다. 이러한 기록은 백제에서 원지 축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뜻한다. 필자는 백제 원지의 구체적인 내용을 추적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이 글을 작성하였다. 백제의 왕들이 원지를 축조했던 계기를 살펴보면, 국가가 불안정하거나 정통성이 부족한 가운데 즉위한 왕이 그러한 난제를 극복하고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원지를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한성시기 진사왕, 웅진시기 동성왕은 각기 국가가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라 왕권을 상당히 안정시켰으나 원지를 축조하여 왕권을 과시한 후에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을 겪었다. 사비시기 무왕도 정통성의 문제를 안고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대내외적으로 왕권을 공고히 한 후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원지를 축조하였다. 그러나 원지의 조성은 실정으로 부각되었다. 무왕은 궁남지에 방장선산을 본뜬 섬을 만들었다. 이 점은 백제의 원지가 도교문화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티브는 중국의 원유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중국에서 원유 조성은 상대 초기까지 소급되지만, 도교문화가 반영된 원지는 진시황제가 축조한 蘭池로 거슬러 올라간다. 진시황제는 그가 사는 궁전을 신선이 사는 곳처럼 만들려고 하였다. 이러한 조치의 일환으로 함양의 궁전에 위수의 물을 끌어들여 난지를 조성하고 그곳에 봉래산과 영주산을 축조하였다. 난지의 조성은 삼신산을 도성 안으로 끌어들인 최초의 조치였다. 이와 같은 원유의 설계는 중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 무제가 조성한 상림원에 속했던 건장궁의 태액지 안에는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이 있었다. 신선에 대한 열망에 사로 잡혔던 한 무제는 신선이 사는 세계를 상림원의 태액지로 구체화시켰던 것이다. 진한시대 이후 여러 왕조에서 궁성에 삼신산을 형상화하였는데, 당은 대명궁의 북쪽에 태액지를 파고 그 안에 봉래산을 만들기고 하였다. 이렇게 도교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원지는 왜에도 영향을 주었다. 왜 추고천황시대에 대신으로 권세를 떨쳤던 소아마자가 그의 집 정원에 못 가운데 섬을 쌓은 방형의 원지를 조성했다. 이러한 모티브의 원지는 백제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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