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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길로 (길림대학교)
저널정보
성균관대학교 인문학연구원(구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 인문과학 제83호
발행연도
2021.11
수록면
177 - 205 (29page)
DOI
https://doi.org/10.31310/HUM.08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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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이후 이른바 ‘조선중화주의’의 상징과도 같았던 대보단에서의제사가 폐지되었고,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러한미증유의 혼란 속에서 이상향과 같았던 ‘중화’의 땅 중국으로 월경(越境) 하는 유림계 인사들이 속속 출현하게 된다. 영남 함안 유림 서천 조정규역시 난세를 피하고 유자로서의 이상을 고수 및 계승하고자 중국 서간도일대로 이주를 도모하였고, 1913년 4월 직접 60세의 노구를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 서간도를 거쳐 북경에 당도한 그는 그곳에서 화인(華人), 즉한족 문인 이종예를 만나 필담을 나누게 된다. 두 사람의 필담은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과 유도’의 향방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지만 그들의 문제의식은 접점을 찾기 어려운 국면을 보였다. 조정규에게 소위 ‘중화’는 중국을 이루는 핵심이념이자 근간이었기에 중화민국은 마땅히 유도의 도통을 이은 ‘명(明)’의 문명 체계를 계승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이종예에게 중화를 상징하는 명은 이미 ‘과거’의 것이었고, 유학이란사실상 ‘져버린’ 이상(理想)으로 귀결되었다. 조정규의 기대와는 달리 이종예는 혁명 이후의 중국에는 더 이상 ‘명(明)?‘한족(漢族)?유도(儒道)? 구제(舊制)’와 같은 전통적 관념이 실행될 여지가 없음을 대단히 직설적으로 설파했다. 이에 조정규는 자신만이라도 중화가 회복되는 그날을 기다리겠다는 신념을 표출하며 그들의 필담은 종료되었다. 요컨대 본 필담은 중화사상을 견지하고 있던 지방의 노유(老儒)가 신해혁명 이후 변화하고 있는 ‘중화 없는 중국’의 현실을 직접 확인한 뒤의 소회와 내적 변화,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중국 문인의 반응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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