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왕현종 (연세대학교)
저널정보
동학학회 동학학보 동학학보 제45호
발행연도
2017.12
수록면
153 - 190 (38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후기이래 대한제국기 양안 자료의 분석을 통하여 1894년 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수원 민란의 발생 원인을 검토해 보려는 것이다. 이 연구의 내용은 1889년과 1891년 2차례의 수원 지역 농민 항쟁의 사회경제적 배경으로는 당시 토지소유와 경영을 둘러싸고 조선 국가, 궁방, 양반과 서리층, 그리고 영세 빈농 사이에 벌어진 갈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우선 1889년 수원 성내 민란은 양반과 서리 및 군 관련 인사들과의 갈등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북부면 소재 수성둔전(修城屯田)의 경우 특정 인물이 전체 소작지의 50%이상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남부면의 경우에는 0.5정보 이하이거나 토지 없는 영세 빈농의 규모가 전체 1,238명 가운데 70.6%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만큼 절대 빈곤에 빠진 농민의 비중이 컸으므로 조세의 과중한 부담을 갖고 있었으며, 또한 수원 서리(胥吏)들의 은결(隱結)이 344여결로 드러날 만큼 조세 수취의 부정이 많았을 것이었다. 또한 1891년 현륭원(顯隆園)의 원군 항쟁은 융·건릉(隆·健陵)이라는 장토에서 마름과 작인의 갈등 및 작인들의 차지경쟁 등에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안녕면(安寧面) 전체 토지 중에서 융·건릉과 관유지의 비중이 40.1%를 차지하고 있었고, 대다수 농민들은 토지가 없거나 영세한 토지를 가지고 있는 농민들이었다. 따라서 장토(庄土)내 소작농민들의 경제적 격차가 크게 차이가 났으며, 소작지 경쟁이 심화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장토의 잘못된 운영방식을 시정하기 위해 농민 항쟁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9세기말 수원 지역 농민층의 분화는 매우 영세 빈농이나 작인층의 대폭 증가로 파악할 수 있으며, 이들은 조세 및 도조의 가중으로 열악한 경제 형편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 분석을 통하여 이전 수원 농민항쟁의 흐름이 1894년 대규모 농민전쟁으로 확대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대한제국기 광무 양안의 분석 결과는 19세기말 수원 지역 토지문제와 농민경제의 현황을 파악해내는 유용한 과학적 연구방법론이 될 것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