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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송한용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69호
발행연도
2018.2
수록면
1 - 30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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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의 천안문사건은 그 자체만 보면 4월 15일 후야오방에 대한 추도에서 시작되어 6월 4일 진압될 때까지의 일이다. 본 논문에서는 이 기간 학생들의 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학생들의 시위양상은 몇 번의 변화과정을 거치는데, 4월 21일까지는 후야오방에 대한 추도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22일부터는 언론과 관료들에 대한 비판으로 바뀌었다. 4월 26일 「인민일보」의 사설에서 학생들의 시위를 ‘동란’으로 규정하자, 학생들은 시위의 순수성과 애국주의를 강조하고 정부당국에 이를 인정하라고 요구하였다. 고르바쵸프의 방문에맞추어 단식농성이 시작됨으로써 시위는 격화되었고, 점차 구호나 주장도 정치적 성격이 농후하게 나타났다. 학생들은 기존의 관변조직인 학생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였다. 하지만 안정되지 못하였고, 결국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지 못하였다. 특히 단식이 시작된 이후에는 여러 조직이 존재하였다. 학생들은 5?4운동에서 자신들의 발판을 찾고자 하였다. 때문에 사상이나 방법 측면에서 5?4운동의 범주를 전혀 벗어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운동방식에 있어서도 계몽주의와 민족진흥에 대한 요청이 지배적이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시켰다. 또한 학생들은 자신들이 결코‘동란’집단이 아니고 현 체제와 이념을 지지한다고 주장하였다. 학생들은 마지막까지 ‘의용군행진곡’과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애국운동임을 인정받고자하였지만 당과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애국주의의 충돌에서 학생들이패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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