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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덕진 (광주교육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67호
발행연도
2017.8
수록면
67 - 96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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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유림은 근대 개혁과 일제 침탈로 약화된 향교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1913년에 존성계를 조직하여 해방 이후까지 운영했다. 계의 인원은 207인으로 출발하여 1919년에는 2,005인, 1970년에는 3,953인으로 증가했다. 그들을 성씨별로 보면 전통적인 유력 성씨였던 여산 송씨, 고흥 유씨, 고령 신씨 등 세 성씨가 주도했고, 면별로 보면 유력 성씨가 집거하고 있는 두원면, 대서면, 동강면 등 세 면의 점유율이 지속적으로 높았다. 계의 재산은 계원으로부터 거둔 400냥을 본전으로 삼아 유력 성씨들을 책임자로 삼아 연리 30%로 이식했다. 이식한 돈으로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지 또한 유력 성씨 것이었다. 기금과 토지에서 나온 수입이 최대 1만 4천냥에 이른 적도 있었고, 제사비와 보수비 외에 자신들 활동비와 함께 대민 교화비와 외부 지원비 등 일제의 권장 항목에 많이 쓰기도 했다. 이처럼 전통적인 유력 성씨가 주도한 고흥 유림은 일제 강점기에 자신들 세력과 전통 질서를 고수하는 데에 향교 존성계를 활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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