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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은희 (유금와당박물관)
저널정보
백산학회 백산학보 백산학보 제120호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287 - 327 (41page)
DOI
10.52557/tpsh.2021.120.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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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용문ㆍ봉황문 막새를 대상으로 제작 시기와 특징을 파악하여 그 계통과 전개양상을 정리해보았다. 유적의 중심 시기인 고려후기~조선전기는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기이자 대외적으로는 元에서 明으로의 교체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암사지는 전환기의 양상과 元과 明의 영향, 중앙과 지방의 양상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며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왕실 문양인 용문과 봉황문이라고 생각된다. 회암사지에서는 봉황문 수막새 3종, 용문 수막새 2종, 용문 암막새 9종이 확인되었고 시간성을 반영하는 속성인 드림새 뒷면 흔적(갈퀴흔→布痕), 주연 형태와 침선 유무(평면ㆍ針線→돌출ㆍ凹線→돌출ㆍ無線)를 기준으로 유형을 분류하고 제작시기를 검토하였다. 그 결과를 중창기록과 타 유적 출토품과의 비교를 통해 제작시기는 1기(~14세기 말), 2기(15세기 초~15세기 말), 3기(16세기 중반)로 설정하였다. 1기는 태조 연간에 해당하는 시기로 원의 영향을 받은 고려시대 후기(제주 법화사지, 개성 고려궁성)의 제작적 특징이 조선 초(경복궁, 양주 회암사지)까지 이어진다. 용문과 봉황문은 왕권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처에 제약이 있었고 元順帝가 제주도에 離宮을 짓기 위해 장인을 파견한 기록, 그 장인이 고려궁성 중건에 참여하는 기록, 조선 건국 이후 한양도성 건설에 고려시대부터 건축술을 가지고 있던 공역승들이 투입된 문헌기록으로 보아 용문ㆍ봉황문 막새 등 왕실기와의 제작 시스템이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2기는 세종~성종대로 회암사에 20~30년 간격으로 크고 작은 불사가 빈번했던 시기이다. 다양한 종류의 용문ㆍ봉황문 막새와 磨硏痕, 明의 영향으로 보이는 봉황문 수막새 등으로 보아 회암사의 높은 위계와 대외적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시기이다. 한편, 막새의 제작기법에 있어서 경복궁을 비롯한 도성 소재 왕실 관련 유적과 다른 지역적 양상이 확인된다. 3기는 명종대로 회암사에서는 여전히 왕실과의 관계 속에서 문정왕후에 의한 불사가 이루어지지만 막새의 문양과 종류가 단순화되어 대대적인 중창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왕실과의 관계가 약화되면서 왕실 사찰로서의 성격을 보여주는 용문ㆍ봉황문 막새는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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