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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오영인 (문화재청)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민족문화연구 제93호
발행연도
2021.11
수록면
7 - 40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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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순화명 청자의 성격, 제작배경과 의미, 위계를 살피고, 제작이 중단된 이후 태묘 의례용 제기의 추이를 제작 및 수급방식의 변화에 주목하여 논하였다. 중국 예서와 제기도는 고려의 제사 공간을 만드는데 일조하였고, 988년 성종은 태묘를 5묘 체제로 삼아 992년 11월에 건립을 마무리하였다. 성종에게 태묘는 국가근본인 효가 구현되는 공간이었고, 태묘의 건립과 제사를 통해 왕위의 정통성을 공표하고자 하였다. 순화명 청자는 이러한 성종의 의지를 담아 992-993년 태묘 의례를 위해 배천 원산리 가마에서 우수한 제작공력으로 제작된 결과물이자, 『삼례도』를 견본으로 제작되고 명문을 개체별로 표기할 만큼 규격화된 공정과 체계적인 제작방식이 적용된 대상이었다. 960년 물장성에서 개칭된 보천은 장인과 진귀품의 보관을 담당하였고, 배천 원산리 가마를 산하에 두어 필요시 장인을 차출하여 순화명 청자를 제작하였다. 993년 이후 순화명 청자의 제작을 비롯해 배천 원산리 가마 역시 운영이 중단되었다. 해당 가마의 운영 중단은 요업상 비효율과 유지의 어려움에 기인하였고, 운영을 중단한 이후 1010년 재차 발발한 거란의 침입에 따른 피해로 왕실의 지원을 받거나 인력의 확보 및 가마 구조의 전환을 통한 재건도 불가능하였다. 1011년 소실된 태묘는 1027년 수리가 마무리되어 의례가 진행되었다. 1029년 태묘 의례용 제기의 확보가 원활히 이행된 배경에는 제기도감의 관할 하에 공물의 형태로 자기제기가 수급되었기에 가능하였다. 992-993년 배천 원산리 가마에서 제작된 순화명 청자는 11세기 이후 용인 서리 및 여주 중암리 일대에서 제작된 백자제기에 태묘 의례용 제기의 역할을 위임하였고, 왕실직속 제작체제의 조달에서 공물 납부방식으로 태묘 의례용 자기제기의 제작과 수급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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