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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찬 (서강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12호
발행연도
2022.9
수록면
5 - 51 (4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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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서간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한경희의 활동과 의의를 밝히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한경희는 1881년 평안북도 龍川에서 태어나, 1903년부터 기독교에 입교하면서 기독교인으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1906년부터 평북 용천과 서간도 지역을 오가며 전도활동을 펼쳤는데, 이때부터 국외선교에 관심을 가졌다. 한경희는 1910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전문적인 신학공부와 해외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였으며, 1914년 졸업과 동시에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목사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경희는 1914년 8월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본신이자 이주한인들이 거주하던 북만주 중동철도 지역에 전도목사로 파송되어 1916년까지 교세확장을 위해 활동하였다. 중동철도 주변 지역은 독립운동기지가 있던 곳으로 그의 전도 활동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과 연계를 맺게 되었다. 이후 1917년, 독립지사들의 망명지이자, 독립운동기지였던 유하현 삼원포 지역의 목사를 담임하게 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게 되었다. 이러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1919년 3월 12일, 한경희는 은양학교 학생 및 기독교인 300명과 은양학교 예배당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면서, 서간도 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12 만세운동을 계기로 한경희는 1919년 4월 서간도에서 조직된 정부인 군정부에 참가하였다. 이후, 그는 서간도 군정부 대표로 위임되어 서로군정서의 설치와 명칭문제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시정부 측과 협상하였다. 협상을 마치고 서간도로 돌아온 그는 한족회 산하 학교인 은양학교의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교장으로써 적십자지회‧대한청년단연합회와 같은 임정단체의 활동을 지원하여 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한경희는 1922년 남만주 장로교의 총 책임자인 남만노회장에 선임되자, 더욱 더 활발한 선교사업을 추진하였다. 특히 그는 한인 청년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았는데, 1922년 유하현 삼원포에 동명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기독교 의식과 민족정신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1923년에는 유하현 지역 유지들과 남만노회 소속이자 평양신학교 출신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남만조선인교육회를 설립하여 통학에 어려움을 겪던 한인청년들의 교육수준을 높이고자 남만주 지역에 중학교 과정의 학교를 설립하고자 했으며, 1926년 삼성중학교를 설립하여 남만주 한인 청년들에게 수준 높은 근대 교육을 제공하였다. 또한 재만한인의 중국 귀화입적과 그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제반문제를 해결하여 한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노력하였다. 한경희는 목사로서 선교사업의 일환인 교육 사업에 주력하여, 서간도 기독교의 발전과 한인 청년들을 위한 민족 교육 및 근대 교육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민족진영과의 연계를 통해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국권 회복과 재만한인의 권익보호를 위해 힘썼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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