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허인욱 (한남대학교)
저널정보
역사학연구소 역사연구 역사연구 제46호
발행연도
2023.1
수록면
215 - 256 (42page)
DOI
10.31552/jh.2023.01.46.215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전북 정읍시 산내면은 이른바 ‘해방구’라 불린 순창군 쌍치면과 바로 붙어 있는 곳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빨치산의 활동이 활발했던 곳 가운데 하나였다. 1949년부터 여순사건으로 인한 여파가 산골인 이곳까지 미쳤으며,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부터 1951년 초까지 빨치산과 군경의 충돌로 인해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당시 남한에서 이용이 가능한 유일한 칠보발전소의 가동을 위해서는 취수구가 위치한 산내면의 안정적인 확보가 매우 필요했다. 아울러 산내면의 확보는 쌍치면과 회문산에 근거를 둔 빨치산 전북도당을 공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군경에게 의미가 깊은 지역이었다. 반면 빨치산의 입장에서는 식량 등의 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는 공급처라는 점과 전북도당이 위치한 회문산을 군경이 직접 공격하는 것을 막아줄 완충지대의 확보라는 점에서 산내면의 상실을 원치 않았다. 양측의 충돌이 지속된 이유이다. 1951년 2월 이후 산내면을 포함한 회문산 주위의 여러 거점을 상실한 빨치산 전북도당은 지리산 등으로의 이동을 선택해야만 했다.
산내면에서의 군경과 빨치산의 대치는 이곳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에게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다. 1950년 10월에 희생자의 수가 급증하였는데, 이는 칠보발전소를 탈환하려는 군경과 빨치산의 충돌이 이 달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민간의 희생과 관련해 1950년 11월의 매대에서의 11사단 소속 학도병들이 빨치산 전북도당 소속 기포병단에 의해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는데, 이 전투는 이후 군경의 분풀이 대상이 저항조차 하기 힘든 여성과 어린이가 포함된 민간인에게 향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매대에서의 18사단 학도병들의 참패와 회문산에서의 군인들의 피해가 산내면 및 쌍치면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목차

국문초록
머리말
Ⅰ. 여순사건 이후 산내면과 빨치산
Ⅱ. 산내면에서 빨치산과 군경의 활동
Ⅲ. 산내면의 민간인 피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23-911-00040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