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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안재성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106호
발행연도
2022.6
수록면
281 - 320 (40page)
DOI
10.37331/JKAH.2022.6.106.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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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渤海 康王代 對外交涉의 전개 과정과 목적을 살펴본 연구이다. 강왕은 재위 동안 唐·日本과 활발하게 교섭을 진행하였으며, 그 결과 왕권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대외교섭의 기록을 분석·검토하는 작업은 강왕이 교섭을 추진했던 배경과 목적을 파악한다는 의미가 있다.
강왕대 대당교섭은 주로 ‘冊封’과 관련하여 진행되었다. 795년 강왕이 받았던 ‘渤海郡王’은 文王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격하된 책봉이었다. 이에 강왕은 靺鞨都督 密阿古를 파견하여 당의 인식을 전환했고, 그 결과 798년 ‘渤海國王’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과 淄靑藩鎭의 충돌로 인하여 교섭이 중단되었고, 이는 말갈의 단독 교섭으로 이어졌다. 강왕은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대당교섭을 재개하였다. 이후 국제정세에 맞춰 사신을 파견하면서 805년과 806년까지 거듭 진봉되었다. 이처럼 강왕은 당과의 교섭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강왕은 일본과도 활발히 교섭을 진행하였다. 교섭 과정에서 강왕은 桓武天皇의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사신 인원의 제한’과 ‘聘期 연한의 철회’라는 발해의 입장을 일본에 관철했다. 이처럼 강왕은 대일교섭의 체계를 재편하여 교섭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강왕대의 대일교섭은 799년을 끝으로 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강왕이 蝦夷의 위협과 801년 蝦夷에 대한 일본의 동북 정벌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804년 能登國에 ‘渤海客院’이 설치되는 등 발해와 일본의 우호 관계는 지속되었다.
이처럼 즉위 초부터 강왕이 주변국가와 교섭을 진행한 배경은 8세기 후반 발해의 국내 정세와 관련이 있다. 국가적 성장을 이룩했던 문왕이 죽은 후 발해에서는 왕위쟁탈전이 일어났다. 따라서 강왕은 지배층의 내분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고자 교섭을 진행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강왕은 연호를 ‘正曆(歷)’으로 정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방향성을 표명하였다. 또한 문왕과 成王의 시호를 확정하였으며, 上京城을 증축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결과 실추되었던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고, 강왕은 15년 동안 발해를 통치할 수 있었다.

목차

국문 초록
I. 머리말
II. 康王代 對唐交涉의 전개와 冊封
III. 康王代 對日交涉의 재개와 교섭전략
IV. 8세기 후반 渤海의 국내정세와 對外交涉의 목적
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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