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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안재성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정호섭
발행연도
2021
저작권
고려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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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초록·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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渤海의 시기구분에 있어서 康王代는 ‘혼란기’·‘내분기’ 등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강왕은 당·일본과 활발하게 교섭을 진행하였으며, 그 결과 왕권이 강화되었다. 따라서 대외교섭의 기록을 분석·검토하는 작업은 강왕이 교섭을 추진했던 배경과 목적을 파악한다는 의미가 있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혼란기’로 평가되었던 강왕대에 대한 인식을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강왕대 대당교섭은 주로 ‘冊封’과 관련하여 진행되었다. 795년 강왕이 받았던 ‘渤海郡王’은 前代 文王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격하된 책봉이었다. 이에 강왕은 말갈도독 密阿古를 파견하여 당의 인식을 전환시켰고, 결국 798년 ‘渤海國王’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과 淄靑藩鎭의 충돌로 인하여 교섭이 중단되었고, 그로 인하여 말갈세력이 발해의 영향권에서 이탈하였다. 강왕은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대당교섭을 재개하였다. 이후 국제정세에 맞춰 사신을 파견하면서 805년과 806년까지 거듭 진봉되었다. 이처럼 강왕은 당과의 교섭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강왕은 일본과도 활발히 교섭을 진행하였다. 교섭과정에서 강왕은 환무천황의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사신 인원의 제한’과 ‘聘期 연한의 철회’라는 발해의 입장을 일본에 관철시켰다. 이와 같이 강왕은 대일교섭의 체계를 재편하여 교섭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강왕대의 대일교섭은 799년을 끝으로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蝦夷의 위협과 801년 蝦夷에 대한 일본의 동북정벌을 고려하여 강왕이 당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외노선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804년 能登國에 ‘渤海客院’이 세워지는 등 발해와 일본의 우호관계는 지속되었으며, 이후 9세기 발해의 북로입항이 공식적으로 인정이 되었다.
이처럼 즉위 초부터 강왕이 주변국가와 교섭을 진행한 배경은 8세기 후반 발해의 국내정세와 관련이 있다. 발해의 국가적 성장을 이룩했던 문왕이 죽은 후 일련의 왕위쟁탈전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國人에 의해 廢王이 시해되었고 成王마저 일찍 죽으면서 발해의 왕권은 실추되었다. 따라서 강왕은 지배층의 내분으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교섭을 진행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강왕은 연호를 ‘正曆(歷)’으로 정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방향성을 표명하였다. 또한 문왕과 성왕의 시호를 확정하였으며, 상경성을 증축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결과 실추되었던 왕권을 회복할 수 있었고, 강왕은 15년 동안 발해를 통치할 수 있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康王代 對唐交涉의 전개와 冊封
Ⅲ. 康王代 對日交涉의 재개와 교섭체계의 변화
Ⅳ. 8세기 후반 渤海의 국내정세와 康王의 王權强化
Ⅴ. 맺음말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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