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선석열 (부경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76집
발행연도
2022.5
수록면
181 - 207 (27page)
DOI
10.18496/kjhr.2022.05.76.181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고는 20세기를 전후하여 일본인 관학자들이 제기한 단군신화의 불가조작설에 대해 검토하고 비판적으로 살펴보았다. 일찍이 일본인 학자들은 일선동조론을 내세우기 위한 목적 아래, 단군이 일본 상고의 신 소전명존이라는 주장이었다.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비판도 있었지만, 이는 단군의 존재를 왜곡한 것이다. 다음 일본인 관학자들의 불가조작설은 한국의 유교사가조차 단군신화를 황탄하여 믿을 수 없다고 말한 점에 가탁하여 조작의 시기, 조작의 주체로서 불교 승려 일연을 들었다. 일본인 학자들은 단군신화에 대해, 중국 역사서에 보이지 않는 점과 조선의 유교사가가 한국 고대의 여러 신화를 황탄하여 믿을 수 없다는 점에 가탁하여 부정하였다. 특히 那珂通世는 단군의 王儉은 평양의 옛 이름인 王險의 ‘險’자를 인편(人扁)[‘儉’]으로 조작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 달리 중국 사서에는 차자표기법을 적용하여 왕험성이 기록되어 있었다. 인칭인왕검과 지명인 왕험은 표기한 것이며 조작은 아니다. 이는 王儉의 ‘王’은 국왕을 의미하는 ‘임금’의 훈독으로써 표기한 것이고, ‘儉’은 임금의 ‘금’을 음독으로써 표기한 것이며, 고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왕검은 인칭으로서 임금이라는 의미였다. 즉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왕검’이었으며, 임금이 거처하는 왕성은 ‘왕험성’으로 표기하였다. 다시 말하면 위만 등장 이전에 이미 왕검의 존재가 전해지고 있었으며, 이후 한국에서는 불가 외에 유교사가들에 의해 인지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도 한국에서는 임금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서 단군신화는 고조선 건국 당시에 인식된 것이며, 이는 고려시대의 승려가 단군신화를 날조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일본인 관학자들에 의한 단군신화 불가조작설의 전개
3. 불가조작설에 대한 비판으로서 왕검의 역사적 의의
4.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