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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지영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서울학연구 서울학연구 제86호
발행연도
2022.2
수록면
115 - 141 (27page)
DOI
10.17647/jss.2022.02.8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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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종에서 영조까지 조선 국왕들의 개성 행행과 의례를 다룬다. 개성은 고려 역사의 본 무대였기에, 새 조선의 왕들은 개성에서 실패한 고려를 대신해 이 나라를 다스릴 자격과 비전을 보여주어야 했다. 세종은 태조와 신의왕후에 대한 기념을 명분삼아 개성에 행차했다. 개성 지역인들이 왕의 행렬을 맞이하며 행행의 정치적 의미를 선양했다. 세종 이후 왕들도 개성에 행차하여 새 조선을 표방하는 의례를 추가로 실행했다. 세조는 세종대 대표적인 ‘생민을 위한 예제’인 양로연을 구도 개성 땅에서 거행했다. 성종은 개성 성균관을 찾아 공자가 가르친 治道에 따라 조선이 운영될 것임을 강조했다. 이 시기 개성 노인과 유생들은 ‘은 나라의 선비’, ‘구국의 유민’으로 호명되며, 새 조선 창업의 의의를 드높이는 의례 속에서 망국 유민의 표상이 되었다.
연산군은 100년 동안 구도에서 쌓아 왔던 조선 왕조의 정당화의례와 그 의미를 완전히 무너뜨릴 계획을 짰으나, 중종반정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연산군의 위기 이후 중종은 다시 조선의 문명지치의 실상을 보여주고자 했다. 사냥이나 연희 등 문명지치 실천자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의례는 거의 사라졌지만, 마지막에 박연폭포 나들이로 오점을 남겼다. 왕조가 ‘문명지치’와의 거리를 번번이 드러내는 동안, 개성 사람들은 고려 유민이라는 규정을 벗어나고 조선 문명의 실천자로 인정받고자 했다. 명종대 개성 유생들은 송악신사를 불태워 입으로만 ‘문명지치’를 외치는 왕조 권력 심층부의 위선을 드러냈다.
임진왜란 때 개성은 다시 파괴되었다. 망국 고려의 그림자는 조선에도 드리워졌다. 다시 조선을 중흥해야 할 책임을 진 숙종과 영조는 태조의 구도에서 왕조 정치의 초심을 되새겼다. 경덕궁과 목청전에서 개성이 태조가 창업할 때 큰 뜻을 품었던 구도임을 환기시켰다. 고려 궁궐터에서는 나라를 유지하는 방법에 관한 옛 성현의 교훈을 되새기며 발분의 노력을 다짐했다. 숙종과 영조는 조선전기의 양로연으로 표현된 ‘생민의 정치에 대한 약속’을 한단계 발전시켰다. 왕이 직접 민인들에게 지역의 병폐를 듣고, 더욱 절실한 민생대책을 제시하는 과정이 개성에서 가장 번화한 남대문 광장에서 생생하게 공연되었다. 두 왕은 개성이라는 구도를 무대로 의례를 펼쳐, 조선 건국기의 초심을 되새기며 생민의 정치를 조선땅에서 해나가서 만월대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했다. 공연을 직접 본 것은 개성인들이었지만, 그 약속의 상대방은 조선 팔도의 백성들이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15세기 국왕의 개성 행행과 ‘문명지치’의 의례_능행, 양로연, 알성의식
Ⅲ. 16세기 국왕의 개성 행행과 의례_‘문명지치’의 위기와 회복
Ⅳ. 18세기 숙종과 영조의 개성 행행_‘生民’의 문명지치, 개성 남문루 의례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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