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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정완 (한림대학교)
저널정보
한양대학교 일본학국제비교연구소 비교일본학 비교일본학 제34권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11 - 137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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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메이지유신에 의해 괴멸상태에 빠진 노(能, Noh)가 천황가와 귀족을 중심으로 부흥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노가쿠도(能樂堂, Nohgakudo)가 공연공간을 제공하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노의 부흥을 상징하는 중심적인 표상이었으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무대예술에서 무대가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나, 특히 노의 경우는 노와 권력의 거리가 지근(至近)했기에 그 의미가 특별하다. 제아미(世阿彌)가 활약한 무로마치 시대는 공연 때마다 설치되는 무대가 집권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자리이기도 했으며, 노가 에도 막부의 국악이자 정악(正樂)이라 할 수 있는 시키가쿠(式樂)로 지정되자 노 무대는 도쿠가와 막부의 권력의 상징으로서 장엄한 무대가 에도성(江戶城) 안에 여러 개 건설되었다. 지금도 ‘노가쿠도’라고 하면 단순한 무대가 아니라 노와 종가(宗家)의 권위와 격식 등을 함의하는 표상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노 무대 즉 노가쿠도가 식민지를 비롯한 이른바 외지 공간에서는 어떠한 전개를 보였으며, 문화장치로서 어떻게 자리매김 되는가를 문화권력 연구의 일환으로서 접근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제국일본이 식민지와 조차지(租借地)라는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며 팽창을 거듭하자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사람과 문화의 이동이 발생한다. 노와 우타이(謠) 또한 경성과 다렌(大連) 등지에 진출하여 우월한 제국의 문화로서 현지 일본인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경성에는 조립식 무대밖에 없었고, 다롄에는 두 개의 노가쿠도가 건립되었다. 이 글 후반부에서는 다롄에 건립된 노가쿠도의 위치를 추적하고 그 의미와 기능에 대해 검토를 함으로써 조차지를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의 식민지노가쿠사(植民地能樂史)의 한 단면을 밝히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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