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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83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5 - 44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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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프랑스의 시각에서 본 1901년 제주민란 현광호 제주민란은 1901년 5월 발생했다. 플랑시는 제주민란의 주원인을 봉세관의 과도한 징세로 인식했다. 프랑스는 5월 9일을 제주민란의 개시 시점으로 인정했다. 프랑스는 제주민란의 주도자를 대정군수 채구석으로 지목했다. 주한 프랑스공사 플랑시는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에게 채구석을 제주민란의 수괴라고 통보했다. 플랑시는 일본인들이 제주민란과 연관이 있다고 인식했다. 플랑시는 민군이 일본인과 결탁하여 신부들을 공격한 것으로 단정했다. 플랑시는 일본의 개입을 예측했으므로 본국 정부에 제주민란에 대한 더 이상의 개입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프랑스 해군 사령관 포티에는 알루에트호와 쉬르프리즈호를 제주도로 출동시켰다. 쉬르프리즈호와 알루에트호는 5월 30일 전후 제주도에 도착하여 프랑스 신부들을 구출했다. 고종은 정부군을 보냈고 추가 파병을 지시했다. 그러자 플랑시는 고종의 민란 진압에 대한 의지를 인정했다. 프랑스는 치안이 회복되었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알루에트호와 쉬르프리즈호는 6월 3일 제주도를 떠났다. 그러나 제주민란이 종식되지 않자 알루에트호는 6월 9일 제주도에 재차 입항했다. 프랑스는 제주목사에게 민군 지도부를 엄벌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포티에는 6월 13일 민군 지도부가 체포되자 6월 19일 제주민란의 종료를 선언했다. 플랑시는 본국 정부에 유사한 사건이 재발할 경우 즉각적인 군사 개입을 건의했다. 그는 군함을 동원한 포격, 민란 지도부의 처형, 지방 당국으로부터 배상금 회수 등을 제시했다. 그는 프랑스는 군사적 개입으로 대한제국 황실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프랑스는 대한제국의 재판에 깊숙하게 개입했다. 플랑시는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민란 가담자의 명단을 건네주며 신속한 재판을 요구했다. 플랑시는 채구석이 극형에 처해지기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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