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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지훈 (경기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 제64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13 - 144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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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天太后 蕭綽(953~1009)은 入宮하여 황후가 된 이후로 遼 景宗을 13년 동안 보좌하였고, 聖宗이 즉위한 후 또한 皇太后의 신분으로 27년 동안 臨朝承制하였다. 이 40년 동안 그녀는 遼代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뛰어난 공헌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승천태후는 탁월한 식견이 있는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군사적인 능력이 있는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1009(統和 27)년, 56세의 承天皇太后 蕭綽은 遼 聖宗에게 還政한 다음, 같은 해에 죽었다. 승천태후가 정치를 하던 시기는 바로 遼가 건국한 다음 약 40년의 힘겨운 경영 후에 遼代가 마침내 매우 강해지는 부흥 시기였다. 承天太后가 통치하면서 專權을 가졌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몇몇 중신들 역시 황태후의 편이었다. 유능한 대신들의 보좌를 받았다는 것은 그녀의 통치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어린 황제 聖宗은 완전히 母親의 간섭을 받았고, 심지어 그가 成年이 되었을 때에도 모친은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는 사서에 기록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계속 국정을 장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승천태후는 결코 폭군이라고 할 수는 없고, 권력의 현실성과 통치 기술을 깊이 체득하고 있는 통치자였다. 그녀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의 건의를 듣기를 원했다. 또한 거란인이나 한인을 막론하고 요조 관원들의 지대한 충성심을 얻었다. 그녀는 스스로 군대의 統帥가 되기도 하였고, 심지어 1004년에는 50여세의 몸으로 송과의 전투에서 군대를 지휘하였다. 하지만 승천태후는 중국왕조에서의 후비섭정과 관련된 일반론과 차이가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우선 승천태후는 아들인 성종이 장성한 이후에도 정권을 돌려주지 않고 계속 섭정하였다. 이는 송대의 경우에는 용인되지 않는 일이었다. 송대는 祖法을 수호하고 趙氏 황통을 유지하기 위한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면 승천태후의 경우에는 그것을 뛰어넘어 통치자로서 군림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황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또한 승천태후는 韓德讓과의 공공연히 부부로 행세하는 관계에 대해 비난받지 않고 오히려 용인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한덕양의 처를 독살했다는 의심까지 받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둘의 관계를 인정받았다. 이 또한 중국왕조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승천태후 개인의 정치적 능력이라는 측면과 요 왕조가 중국식의 통치체제를 표방하면서도 유목적인 특성을 견지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승천태후는 『요사』에서 섭정시기의 통치행위에 대해서는 「성종본기」에 들어있지만 『요사」의 열전이나 당시 사료에서 그녀의 전투 참여와 활약상이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고, 평가도 대체적으로 긍정적이다. 그녀는 대리자로서의 섭정 황태후가 아니라 당당한 여성 정치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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