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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양자량 (숙명여자대학교)
저널정보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인문과학연구 제26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139 - 160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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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는 문헌사료와 금석문을 통해 6세기 초 신라의 지증왕․법흥왕대 왕권과 그에 따른 갈문왕의 지위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6세기 초 금석문을 통해 갈문왕은 귀족회의에서 주요 국정 현안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소지왕 말기 왕권이 약화되자 지도로 갈문왕은 강대한 세력의 지지에 힘입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갈문왕은 왕위계승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명분은 취약했을 것이다. 자신의 약한 명분과 약해진 왕권을살리기 위해 지증왕은 즉위 이후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530년대는 6부체제가 해체되고, 법흥왕대 집권화된 지배체제가 완성되어 가는 시기였다. 이는 왕권이 성장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법흥왕은 갈문왕으로서 왕위에오른 지증왕의 전례를 견제하고자 갈문왕의 지위를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갈문왕의지위가 격하됨에 따라 그 역할을 대신 한 것이 바로 법흥왕 18년(531) 설치된 상대등이다. 법흥왕은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로 갈문왕이 아닌 상대등을 설치하여 갈문왕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가질 수 없는 유명무실한 위치, 왕족에게 주는 명예직화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지증왕 이전에는 6부체제의 아래에서 왕권이 약했기 때문에 혈연관계에 있던 갈문왕을 동반자로 여겼다면, 지증왕 이후 스스로 왕권을 강력하게하기 위한 개혁을 통해 혈연관계로 있던 갈문왕이 아닌 관료화된 상대등을 동반자로서 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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