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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양자량 (숙명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지도교수
정병삼
발행연도
2014
저작권
숙명여자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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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2)

초록·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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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울진봉평신라비(이하 봉평비), 1989년 영일냉수리신라비(이하 냉수리비)의 발견은 신라 중고기 정치사에 활발한 논의를 가져왔다. 특히 문헌사료에서 볼 수 없었던 ‘至都盧葛文王’이 판독되면서, 지증왕이 즉위하기 전 갈문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갈문왕이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전 학계의 주된 견해를 뒤집는 사례가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지도로 갈문왕이 왕이 된 후, 왕과 갈문왕의 관계가 이전과 같은지 혹은 변화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중고기 이 후 갈문왕의 지위가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문헌사료와 금석문을 통해 6세기 초 신라의 지증왕·법흥왕대 왕권과 그에 따른 갈문왕의 지위 변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6세기 초 금석문을 통해 갈문왕은 귀족회의에서 주요 국정 현안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지도로 갈문왕은 사훼부 소속으로서 3대째 갈문왕을 세습 받아 온 것을 통해 강대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마침내 소지왕 말기 왕권이 약화되자 지도로 갈문왕은 강대한 세력의 지지에 힘입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갈문왕은 왕위계승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명분은 취약했을 것이다. 503년 냉수리비에서 왕(마립간)이라 칭하지 못한 것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약한 명분과 약해진 왕권을 살리기 위해 지증왕은 즉위 이후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530년대는 6부체제가 해체되고, 법흥왕대 집권화된 지배체제가 완성되어 가는 시기였다. 이는 왕권이 성장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왕호’는 그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이 시기 사용된 왕호는 麻立干, 王 , 寐錦王, 太王이다. 봉평비에서만 유일하게 보이는 寐錦王은 마립간을 뜻하는 寐錦과 그 이후의 바뀐 왕호인 王이 혼용된 것으로 두 왕호를 함께 써 더욱 더 신장된 왕권을 염원하는 법흥왕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한편 법흥왕은 갈문왕으로서 왕위에 오른 지증왕의 전례를 견제하고자 갈문왕의 지위를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갈문왕의 지위가 격하됨에 따라 그 역할을 대신 한 것이 바로 법흥왕 18년(531) 설치된 상대등이다. 법흥왕은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로 갈문왕이 아닌 상대등을 설치하여 갈문왕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가질 수 없는 유명무실한 위치, 왕족에게 주는 명예직화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지증왕 이전에는 6부체제의 아래에서 왕권이 약했기 때문에 혈연관계에 있던 갈문왕을 동반자로 여겼다면, 지증왕 이후 스스로 왕권을 강력하게하기 위한 개혁을 통해 혈연관계로 있던 갈문왕이 아닌 관료화된 상대등을 동반자로서 두었던 것이다.

목차

Ⅰ. 머리말 = 1
Ⅱ. 지증왕대의 정국동향과 왕권 = 7
1. 지도로 갈문왕의 즉위 = 7
2. 지증왕의 개혁정책 = 18
Ⅲ. 법흥왕대 갈문왕의 성격 = 25
1. 왕권강화와 寐錦王의 칭호 = 25
2. 갈문왕의 성격 변화 = 36
Ⅳ. 맺음말 =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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