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성환 (경기문화재단)
저널정보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 선사와 고대 제57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55 - 77 (23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고려시대 태조를 모신 眞殿, 즉 태조진전은 그 성격에서나 太祖眞의 형태에서 다양하였다. 개경에는 유교에서의 위패 형태의 신주를 모신 太廟와 도교적인 성격에서 진영(초상)을 모신 景靈殿이 있었다. 태묘와 경령전에서 태조는 不遷之位였다. 또 서경에는 태조의 진영(초상)을 모신 聖容殿이 있었다. 이곳은 태조만 봉안되어 있었는데, 청색의 곤룡포(袞)에 면류관(冕)을 쓴 천자의 복식으로 仍几를 깐 黼座에 앉은 모습이었다. 지방 관아에서도 태조진을 모신 사당이 곳곳에 있었다. 평안도 영유현의 태조영전, 충청도 천안의 태조묘 등이다. 모두 진영(초상)을 모시고 있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바와 같이 태조의 진전사원으로는 개경의 봉은사가 대표적이다. 봉은사는 태조의 원당으로 광종 2년에 창건되어 고려시대 태조신앙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였다. 태조 王建像을 봉안했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개경의 대안사·영통사에도 태조진이 봉안 또는 이안되어 있었고, 남경신궐과 개경의 수창궁에도 일시적으로 태조진이 봉안되기도 하였다. 봉은사 이외에 연산 개태사, 기주 봉암사, 죽주 봉업사에도 태조진이 봉안되어 있었고, 태조진을 모신 구역에는 진전이 설치되어 있었다. 개태사의 태조진은 봉은사의 왕건상과 같은 鑄像 또는 塑像의 조각상으로 추측된다. 봉업사에 봉안되었던 태조진은 진영(초상)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서의 태조진은 광종의 봉업사 중창시기인 광종 14~18년 사이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봉업사에 태조진전이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봉은사와 같이 왕실에서 봉업사 경영에 직접 참여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 경영은 죽주의 토착세력인 박기오 계열의 죽산박씨와 죽산안씨 등에 의해 주도되었을 것이고, 문종과 고종 때의 청동으로 제작된 향완·향로·반자 등으로 자료를 통해 볼 때, 왕실의 일정한 후원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왕조 조선의 건국 후, 고려의 흔적지우기를 위한 작업들이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왕건상으로 대표되는 태조진전과 관련한 흔적의 삭제, 또는 파괴는 대표적이었다. 이 과정에 봉업사 역시 제외되어 있지 않다. 봉업사가 조선전기 폐사되었음은 이와 관련이 있다. 봉업사의 태조진 역시 이 과정에서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려시대 태조진을 봉안한 지방의 사찰로 연산 개태사·기주 봉암사·죽주 봉업사 등이 알려져 있다. 이들은 태조의 원당사찰(진전사원)이었던 개경의 봉은사와 그 위격을 비교할 수 없지만, 태조진을 모시고 있는 사찰이라는 점에서 넓은 의미에서 태조의 진전사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개경의 영통사, 대안사 등의 태조진전에 태조진이 봉안되어 있었을지라도 이곳을 태조의 진전사원으로 구분하지 않은 것과 같다. 태조의 진영과 주상, 소상을 모두 포함하여 태조진을 모신 중앙과 지방의 사찰들은 태조의 원당사찰(진전사원)인 봉은사를 중심으로 일정한 시스템에서 연동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