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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19권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55 - 94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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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비는 國師나 王師, 혹은 그에 준하는 고승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여기에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와 서예가 및 刻手가 동원되었으며 상당한 인적·물적 자원이 투입되었다. 현재 확인되는 사례로 보았을 때, 고승비는 9세기 초에 처음 등장하여 신라가 망하는 935년까지 10여 기가 건립되었다. 이에 비해 태조대에는 937년부터 943년까지 7년간 8기가 건립되었다. 후삼국을 갓 통일한 고려로서는 단시일 내에 다수의 비를 건립한다는 것이 분명 부담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태조대의 고승비 건립은 이를 감수할 만한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본 논문에서는 선행 작업으로 비가 건립되는 제반 규정을 살펴 고승비가 갖는 위상을 추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고려시대 이전의 고승비 건립 양상을 분석하여 태조대의 경향과 비교하였으며, 태조대의 비 건립에 영향을 준 요인은 무엇인지 밝히고자 하였다. 또한 비 대상자와의 관계, 비가 건립되는 지역, 陰記에 기재된 내용 등을 분석함으로써 태조가 적극적으로 고승비 건립에 나선 의도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고승비 건립이라는 행위가 건국 초의 혼란을 다스리려는 정치적 전략 가운데 하나로 이뤄졌음을 밝혔다. 비 건립은 기존의 재지 세력과 선종 사원이 맺었던 구조를 해체하여 ‘高麗’라는 국가 질서로 재편해가려는 의도에서 수행된 정책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태조는 정치적인 의도를 담아 고승비를 전국 각지에 세움으로써, 지방에 뿌리내린 선종과 이를 숭앙하는 세력을 고려라는 틀 안으로 동화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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