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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명진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51권
발행연도
2023.5
수록면
197 - 226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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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유배형 선행연구에서 태조대의 경우는 제외되었다. 이에 이 글에서는 먼저 태조대 유배형의 시원을 살펴보았다. 기록상 한국사에서의 유배형은 660년(의자왕 20) 백제의 사례가 그 첫 사례였다. 신라에서는 701년(효소왕 10)과 828년(흥덕왕 3)에 섬 유배 사례가 찾아진다. 섬 유배는 섬 목장에서 말을 키웠던 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고대부터 시행된 유배형이 고려 태조대에도 이어졌다. 태조대에는 918년에 집행된 류문률과 주선갈의 변경 유배가 첫 사례였다. 태조대 유배형은 섬 유배와 내지 유배로 분류할 수 있다. 태조대 섬 유배의 시원은 931년에 유금필이 곡도(백령도)로 유배 간 경우였다. 그런데 그의 유배지가 왜 곡도인가는 당시 전쟁의 시기였던 상황을 이해하여야 했다. 고려는 후백제의 군사적 영향력이 미칠 섬으로 죄인을 유배하지 않았다. 이처럼 당시 섬 유배형 집행은 한정적이었다. 다음은 내지 유배 실상을 검토해 보았다. 류문률과 주선갈의 유배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북쪽 변경이 유배지였을 것이다. 936년 9월 통일전쟁에서 승리한 왕건은 견훤의 두 아들인 양검과 용검을 내지인 진주(眞州)로 유배 보냈다. 이 글에서 세밀한 검토 끝에 진주(眞州)는 현 강원도 삼척이라고 비정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곳을 유배지로 선택한 이유는 혹시 모를 후백제 민(民)의 복국(復國) 운동과 동요를 차단하기 위한 조처로 이해하였다. 견훤의 두 아들은 진주(眞州, 삼척)로 유배 온 후에 처형되었다. 이와 같이 태조대 유배형은 형벌로서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 집행은 전쟁의 시기라는 특수한 상황에 맞게 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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