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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강기천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최형섭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역사 사회와역사 제119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41 - 73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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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본격적으로 국가 혁신 체계의 일부로 편입되기 이전 공학 교육의 사정을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당시의 공과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은 한국전쟁 이후 전후 복구가 이루어지고 산업화가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공대 졸업생이 한국 사회에서 담당해야 하는 역할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표출했다. 특히 조선, 철강, 기계 등 아직 한국에 해당 분야 산업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분야를 전공한 공학도들은, 배후 산업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일부 공대 교수들은 자신들의 존재 근거인 공업이 부재한 상황 속에서해외 사례를 바탕으로 한 막연한 이상론으로 미래 비전을 구축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학보 『불암산』 및 각종 매체를 통해 드러난 공학 연구와 교육에 대한 담론은 한국의 공과대학이 기능 인력을 양성하는 직업훈련소와과학기술 교육 및 연구 기관 사이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모색하려는 모습을 드러내는 자료이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공학도들은 한국전쟁 이후 미국으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 사업을 진행했고, 이를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이후 미국의 공과대학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과 유사한 역할을 맡게 되리라는생각을 품었다. 하지만 서울공대 교수들의 미국화(Americanization) 구상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후발 산업화를 막 시작한 한국의 맥락이 미국의 그것과 달랐을 뿐 아니라,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대학을 국가 개발 프로젝트의 파트너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과대학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외부의 영향으로 특정한 방향으로 제한/굴절되었고, 한국 사회에서 공과대학의 역할이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것과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공과대학이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된 것은 오히려 1960년대의 현실과 맞지 않는 지향점을 당시 공과대학이 좇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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