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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계미향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불교학회 한국불교학 한국불교학 제78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477 - 507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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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현재까지 파악된 총 15명의 천축구법승 가운데서 8세기 중엽의 신라왕자 출신의 밀교승 無漏의 행적과 그가 주로 활동했던 중국 닝샤(寧夏)자치구 하란산 인근의 불교와의 관련성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6세기에 백제의 율승 겸익으로부터 시작된 천축구법승의 행렬은 7, 8세기에까지 이어졌다. 무루는 신라의 왕자출신임에도 왕위 계승을 거부하고 渡唐하였다. 그는 당에서만 머물지 않고 불적지의 순례와 경전 入手를 위해 다시 천축구법의 長 途에 올랐다. 무루는 육로로 서행하여 天山南路를 통해서 于闐을 지났다. 그러나 葱嶺(파미르 고원)의 한 사원에서의 일을 계기로 자신의 길이 중국에서의 교화에 있음을 알고 현 닝샤자치구의 賀蘭山 白草穀으로 돌아와 정착하였다. 백초곡에서의 무루의 활동이 세상에 알려진 시기는 ‘安史의 난’으로 인한당 현종과 그 아들 숙종의 황위 교체기였다. 닝샤의 靈州에서 즉위한 숙종은亂을 평정하고 唐을 안정시키기 위해 불교에 많이 의지하였다. 숙종이 꿈에서여러 번 보았다는 고승 無漏는 하란산에서 항상 寶勝佛을 염송하는 신이한승려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숙종은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고 마침내 郭子 儀를 보내어 무루를 行在所의 內寺로 모셔와 가르침을 받았다. 한편 같은 시기에 蜀으로 몽진한 현종은 無常禪師를 가까이서 모시고 있었다. 현종과 숙종부자가 같은 시기에 신라의 무상과 무루에게서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숙종은 난이 평정되어 장안으로 돌아올 때에도 무루를 모셔와 不空三藏과함께 궁궐내의 사찰에 머물게 하였다. 얼마 후 무루는 이적을 보이고 입적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靈州의 下院으로 이운되었다. 하원은 무루가탁발을 위해 하란산 백초곡에서 내려올 때 머물기 위해 만든 사원이다. 그런데 그간 무루의 행적을 전하는 사료의 부족으로 무루가 수행했던 하란산 백초곡이나 무루의 유체를 모셨다는 하원의 위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닝샤자치구 銀川市의 고고학적 발굴을 토대로 하란산 백초곡과 무루의 유해를 모셨다는 하원의 宏佛塔의 소재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무루는 입적한 지 약 300여 년이 지나, 영주에서 건국한 西夏國에 의해 다시 역사에 재등장하였다. 건국 초부터 불교를 국가통치이념으로 삼은서하황실은 山西省 오대산 문수보살 성지에 참배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국가행사로 여겼다. 그러나 宋과의 전쟁으로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서하 황실은하란산을 자신들의 오대산으로 상정하여 문수보살의 주처지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무루가 수행하던 백초곡은 서하 불교도들의 신앙의 중심이 되었고, 그의 유체를 모신 하원에도 굉불탑을 세워 그 격을 높였던 것이다. 당 숙종의 스승이었던 무루는 이렇게 서하황실에 의해 다시 역사에 등장하였다. 그가 수행하던 백초곡과 하원은 서하의 북오대산 신앙의 중심이 되었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에까지 해당 지역에 널리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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