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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일걸 (성균관대학교)
저널정보
백산학회 백산학보 백산학보 제105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107 - 152 (4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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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 목극등이 세운 백두산정계비는 국경비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19세기 말부터 이주한 간도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부에서 서상무, 이범윤을 관리사를 파견하였다. 심지어 레지(Regis)의 비망록에도 “봉황성의 동쪽에 조선국의 국경선이 있다”고 하였다. 17세기 말에 시작한 청의 백두산 일대 탐사는 처음부터 삼도구 지역인 환인~통화 일대에서 시작하였다. 청인들이 장백산이라는 부르는 산은 휘발하 상류의 계림합달령이다. 왜냐하면 휘발하를 서양 고지도에 ‘토문하’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인에는 압록강의 주류인 동가강이, 산 너며 휘발하는 송화강으로 흐른다. 따라서 그들은 계림합달령에 세워야 할 비를 조선의 대표인 박권·이선부를 강박하여 계림합달령과 비슷한 백두산에 세우고, 오도백하를 ‘토문강’으로 개칭하였다. 서양 고지도에는 조선의 국경선을 레지선, 당빌선, 본느선으로 세 종류로 구분하여 그려져 있다. 결국 당시 백두산과 삼도구 일대의 수차례 답사를 통해 지세를 익힌 그들은 영토 확장을 위해 지리정보에 어두운 조선의 관리들을 속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이미 청의 강희제는 정계비 설치를 위해 성경지도 등을 변조하였으며, 심지어 서양신부들이 측량하여 만든 황여전람도마저 변조하였다. 결국 1909년 간도협약으로 인해 한․중의 국경선은 압록강~두만강선으로 결정되어 지금까지 표기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결정이었다.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무효조약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간도협약의 무효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 결과 광복 후 70년이 지나도록 중국이 간도지역을 불법점유한 상태다. 이는 우리 정부의 역대 위정자들의 무능으로 인해 초래한 결과이지만 애초 강희제의 영토 확장 전략으로 세운 백두산정계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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