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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기용 (진주교육대학교)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영남학 제75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57 - 87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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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陽節 범국회의 유래는 2-3세기 경 중국에서 사람들이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경덕왕 때(765) 중양절 기록이 처음 나타났다. 고려시대에 는 문인들이 국화를 은일과 절조의 의미로 표현하였고, 조선시대 16-17세기에는 절개의 이미지로 정착되었다. 용산범국회를 결성하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다. 동계의 정치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에 동조하는 사족들이 서로 교류하고 있었다는 점, 62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1630년부터 용산 선영 아래서 시묘할 때 후학을 지도하며 학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 모인 사람들이 친족이거나 인척으로서 혼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 결과 1636년 9월 9일에 落帽臺에서 5개 고을의 士族 21명이 용산범국회를 결성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동계가 모리재에서 은거하다 생을 마치자 용산범국회 모임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후손들의 婚脈과 학문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泛菊會 재개 움직임은 1898년부터 있었다. 조선의 국내외적 정국이 혼란하고 국권을 침탈하려는 외세의 위협에 회원의 재결속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 재개의 동기였다. 그래서 1900년에 續契하였고, 1941년에는 모임을 하고 회원 명부를 작성하였는데 이때 회원이 모두 405명이었다. 1996년에 등록된 회원 수는 643명으로 늘어났고, 거주지는 嶺南 지역 중심에서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확산되어 친목 모임으로 전개되고 있다. 용산범국회는 정치사적 공동체의 성격, 관계공동체의 의미, 역사․문화적 공동체의 성격, 1996년 이후는 은 친목 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현재는 회원 수가 늘고 거주지가 확대되면서 회원 간의 학연․혈연 의식은 옅어졌으나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은 확산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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