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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수진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이승훈 (장명초등학교) 이동형 (차산초등학교)
저널정보
호남고고학회 호남고고학보 호남고고학보 제62권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94 - 127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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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발굴된 읍성유구와 문헌자료를 분석하여 축성시기를 유추하고, 시기에 따라 읍성 축조양상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시간적 범위는 읍성이 활발하게 조성된 조선 초로 하였으며, 공간적 범위는 발굴조사된 유적 중 시기별 분석이 가능한 나주읍성, 강릉읍성, 언양읍성, 웅천읍성, 사천읍성, 하동읍성, 무장읍성의 체성부로 하였다. 읍성은 읍치(관아시설)가 있는 城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 초기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축성 재료를 가지고 읍석성, 읍토성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성벽 즉 ‘廓’을 의미하는 것으로, 후기 지리지인 『輿地圖書』에서의 ‘邑城’ 또는 읍격을 사용한 ‘府城’이나 ‘郡城’ 등의 표현과는 의미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읍성은 고려 말 外敵의 침입에 대한 대응책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의 읍성은 직접 전투를 위한 군사시설이라기 보다는 읍치(관아)시설을 지키기 위한 보호시설에 다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개국 후 각 지방에 강력한 왕권(중앙집권체제)를 상징하는 읍치시설을 조성하였으며, 이와 함께 축조된 읍성은 그 중요성 만큼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때문에 몇 차례에 걸친 축조양상의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이를 시기별로 정리해 보면, ① 고려 토성(石心土築城)을 이용한 축성법(개축) - 개국 초, ② <築城新圖>를 통해 반포된 축성법(신축) - 세종 20년(1438년) 전후, ③ 이보흠의 상소 이후 축성법(신축) - 세종 25년(1443년) 이후로 나눠볼 수 있다. 그러나 읍성은 양란 이후 그 실효성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대두되면서, 더 이상 새롭게 축성되지 않았고,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읍성들마저도 성문을 제외하고는 그 기능을 상실한 채 방치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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