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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재호 (국립중앙박물관)
저널정보
국립중앙박물관 미술자료 미술자료 제94호
발행연도
2018.12
수록면
147 - 163 (1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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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菊蝶圖〉는 여기화가였던 홍낙최가 그렸으며, 그의 맏형 홍낙성이 발문을 썼고 둘째 형 홍낙명이 화제를 짓고 셋째 형 홍낙삼이 화제 글씨를 쓴 작품이다. 사대부가의 네 형제가 함께 완성한 서화작품은 유례가 드물거니와, 이들이 18~19세기의 유력한 경화세족이었던 풍산 홍씨 가문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문화사적 의미가 크다. 〈국접도〉는 1910년 이왕가미술관에서 구입하였던 작품으로, 현재의 족자는 입수를 전후한 시기에 새로 장황되었다고 추정된다.
화제는 국화에 대한 문학적 전통인 굴원의 「이소경」과 도잠의 「음주이십수」에 근거하여 국화를 은거자의 꽃으로 상찬하였고 국화를 그린 홍낙최가 도에 가까이 다가가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발문은 1751년 음력 8월에 네 형제가 솜씨를 모아 〈국접도〉를 제작한 경위를 밝힌 글이다. 화제와 발문에 따라 〈국접도〉는 노론 명문가였던 풍산 홍씨 가문의 자손들이 형제의 자취를 모으기 위해 제작한 작품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선비의 상징인 국화를 소재로 하여 경화세족이면서도 隱逸의 정신을 품은 형제들의 도학적 우위를 과시하였다.
홍낙최는 투병 끝에 23세로 요절하였는데, 어려서부터 탈속한 은자의 풍모를 지녔다는 기록이 친인척이 남긴 여러 哀辭에 전하고 있다. 특히 홍낙인이 쓴 「再從弟子善惡最哀辭」는 홍낙최가 “기이한 꽃과 괴석 그림에 뛰어났는데, 종종 꼭 닯게 그렸으나 오히려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증언하여 〈국접도〉와 연결되는 기록으로 주목된다. 〈국접도〉는 18세기 화보의 유행에서 비롯된 사군자 국화도와 화풍에 차이를 보인다. 〈국접도〉의 평면적인 공간감, 대칭적인 곤충의 배치 등은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는 일련의 초충도와 유사하다. 18세기에는 노론 문인들이 전 신사임당 초충도를 감상하고 글을 남기는 문화가 유행하였다. 홍낙최 또한 노론을 지향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당시 관심을 모으던 신사임당 초충도의 일부를 감상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국접도〉의 구도와 구성은 홍낙최가 동시대의 문화적 현상을 충분히 반영하였음을 보여준다. 홍낙최가 국화를 관찰하고 핍진하게 그려낸 것은 당시 낙론계 문인들이 人物性同論을 바탕으로 玩物을 도학적으로 긍정하고자 했던 觀物論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생각된다. 국화를 완상하고 핍진하게 그려내는 일은 은일과 지조를 심성에 새기는 도학적 의미까지도 지녔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명문가의 네 형제가 국화 그림을 중심으로 문장과 서예를 더한 것도 이러한 관념 하에서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이력과 형태적 특징
Ⅲ. 화제와 발문 검토
Ⅳ. 〈국접도〉의 작자와 18세기 문예관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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